선량하고 다정한 아내를 옆에서 보면서 느끼는 감상
어느 시절인가 끈적거리고 아련한 감상이 잠깐 유행처럼 돌다가 푹 꺼지면서 시니컬한 감성이 치고 올라오던 순간이 있었다. 오글거린다며 과거의 행적들을 비웃거나 감정적인 사람을 향해 조롱하는 것이 쿨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던 그런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돈이 최고였다가 사랑이 최고였다가 돈이건 사랑이건 소 닭 보듯 하며 스윽 지나치는 쿨함이 최고였던 시대들이 제각각 사람들을 치고 지나갔다. 화려하게 집 안을 가득 채운 인테리어가 유행하다가 갑자기 훅 꺼져 온통 화이트톤에 물건은 한두 개만 놓은 미니멀한 인테리어가 유행하는 것마냥 양극단은 마치 이어진 것만 같았다.
감성에 취했다가 취한 자신을 한심하게 봤다가 그 한심함을 꾸짖으며 다시 감성에 풍덩 빠졌다가 무기력에 가까운 쿨함으로 무장했다가 옛날 감성이 좋았다고 복고풍을 쫓았다가.
일관적인 것은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서 사는 나는 늘 그 시대정신에 맞춰 휘청거리듯 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원래 줏대를 지킬 만큼 고집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다만 너무 감성적인 것은 낯 뜨거워 못 하였고, 너무 쿨한 것도 낯 뜨거워 할 줄을 몰랐다. 그러니 시대정신에 맞추는 것조차 대강대강 건성으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의 기본적인 태도는 초연함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후려칠지 모르니 맞을 준비를 하고 얻어맞더라도 초연하게 굴면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원래 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자꾸 고통을 마주하면 속이 타들어가는 듯하니까 초연하게 괴로움을 직시하자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 태도는 나의 기본적 성향과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런데 아내와 함께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내가 고집하던 나의 초연함이 어쩌면 무심함을 좋게 포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 생각이 거의 확신에 가까워졌고.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이에게 불행한 결말이 완벽하게 예상되는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면 나는 별 말을 않고 그저 들어주고 그 시간을 종결할 가능성이 높다. 그 결말조차 상대의 몫이며, 상대의 선택에 따른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나는 보통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초연하고 침착한 태도로 들어주기만 하는 대나무 숲 역할을 잘 해낸다.
아내는 나와 다르다. 아내는 그 말을 한 상대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먼저 생각하는 것 같다. 상대가 소중한 사람이라면 아내는 관계가 다소 불편해지더라도 상대의 불행을 막기 위해 날 것의 언어를 사용해서 그 길을 막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로 인해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소중한 사람이 괴로운 결말에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알 수 있다. (본인이 인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에너지에 가끔 감탄한다.
아내의 선량함은 엄청난 감정적 에너지를 수반해야 가능하다.
내가 아내처럼 한다고 생각해보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에너지 소비이다. 날 때부터 활력이 부족했던 나는 내 정신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적당하게 무심한 쪽을 택하고 있으며, 그것을 초연함으로 가장해왔던 것뿐이었다. 초연하니까 그게 더 멋지고 쿨한 삶인 것처럼.
아내는 자신을 멋지다고 생각하기 위해 선량함이나 다정함에 에너지를 쏟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렇다. 아내는 기본적으로 체력이 정말 강한 사람이다. 육체적인 체력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체력도 강한 사람이다. 그 강함이 타고난 것인지 본인의 훈련을 통한 것인지까진 알 수 없지만 다정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체력을 수반하는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아내의 성실한 선량함엔 늘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상점이나 음식점에서 늘 습관처럼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나 뒤에 오는 사람까지 신경을 써서 걸음을 빠르거나 느리게 할 줄 아는 사람, 카페에서 다 마신 잔을 어디에 가져다 달라고 쓰여있는지 안내문을 유심히 보고 그대로 하는 사람, 차를 운전할 때 달리면서 창문에 워셔액을 뿌리지 않는 사람(이건 정말 이유를 모르겠어서 물어보니 뒷 차로 물이 튄다는 이유였다), 배달음식 그릇을 내놓을 땐 물로 가볍게 설거지를 해서 내다 놓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의 아내이다. 심지어 저 일화들은 지금 쓰면서 기억에 나는 일만 써본 것이다.
최근 범죄자들이 뉴스에 나와 자아도취하듯 '악에 물든 나'를 뻐기면서 이야기를 하는 꼴을 아내와 함께 본 날이 있었다. 둘이 같이 혀를 찼고 도대체 왜 저런 꼴의 자신에 대해 멋지다고 생각하는가 이해가 되질 않는다고 한참 비웃으며 이야기를 나눴었다.
"선량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더 어렵지, 악마처럼 사는 건 하나도 어려운 게 아니야. 오히려 엄청 쉬운 거 아니야? 근데 뭐가 멋진 거지? 그냥 저 편한대로 사는게? 웃기시네."
내 말에 아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내뱉으면서 그 사실을 퍼뜩 실감했고, 이 이야기를 글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선량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옆에서 함께 사는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고요하지만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리고 내놓고 비교하면 악에 물든 무언가 다크한 감성(으악!)보다는 기묘하게도 폼이 나질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도 사실은 착하게 살자는 말이 이상하게 더 밉게 느껴지고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그러나 옆에서 선량하려고 노력하는 삶을 지켜보며 체감한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선량하고 선하게, 착하고 평범한 삶을 차분차분 지켜가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는 그 삶이 어려워서 잘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지, 내 선택에 의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걸 늘 기억하려고 애쓴다.
그렇게 명확하게 인정하는 것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 같아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