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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May 04. 2020

어느 날 퇴근 후 카페에서 생각했다

사랑이란 이름을 빌어 상대를 통제하지 않겠노라는 기묘한 다짐에 대하여


어느 날 퇴근을 하고 무작정 서울의 밤거리를 걸었던 밤이 있었다.

공기가 미지근했던가, 따스했던가 그랬던 것도 같은데 사실 기억의 날조 인지도 모른다. 시기를 더듬어보면 분명 늦겨울 또는 초 봄이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추위에 취약한 사람이 겨울 밤거리를 걸으며 찬 바람이 기억나지 않다니 분명 홀린 듯 그저 다리가 허락하는 대로 걸었음이 틀림없다.


나는 그냥 걸었고 걷다 보니 익숙한 번화가에 도달했다. 24시간 하는 카페가 있었고 집까지 가는 버스의 막차시간은 아직 남아있었다. 가방 속에는 그 당시 늘 가지고 다녔던 가벼운 소설책 한 권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차피 더 걷기도 무리였고 오랜만에 긴 시간 걸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한 다리가 항의 중이었을 테니 눈에 띈 24시간 운영 체인 카페가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잠시 다른 소리를 하자면 나는 힙한 카페보단 체인 카페의 틀에 박힌 평범함을 좋아한다.

평균적인 아메리카노의 맛과 어딜 가든 똑같은 주문방식과 메뉴, 냄새와 적당하게 편안하고 적당하게 불편한 의자와 테이블의 구성까지. 그리고 흡연실도 대부분 구비되어 있어 카페 안에 들어가 담배는 나가서 피우라는 건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 날 넓고 쾌적하고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던 그 카페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책을 펼쳐 들고 소설 속에 빠져들어 잠깐 읽다가 창문을 보니 밤 특유의 공기 냄새를 품은 바람이 들어왔다. 눈을 살짝 찌푸리고 보니 밤의 네온사인이 흐드러진 불꽃처럼 보였다.

아, 아니다. 이조차도 기억의 날조 인지도 모르겠다. 그 날은 너무도 오래된 기억이다. 아주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시간 축의 어딘가를 퍼내어 쓰다 보면 날조되기 쉬워서 객관성을 가지고 중심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질구질한 자기 미화로 포장한 무언가가 되어 버린다. 

오래된 기억일수록 퍼내어 문장으로 다루기가 도통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나는 되도록 그 기억의 촉감, 질감을 매만지고 더듬어가며 써보고자 한다.


바람이 어떻게 들어왔건 네온사인을 봤건 어쨌건.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소설책을 어느 정도 읽다가 고개를 들고 핸드폰을 본 순간 느껴진 엄청난 해방감.


그 해방감만큼은 거짓도 날조도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백 프로의 자유였다. 

그렇다, 나는 그 날 완벽하게 자유였다.


흐름상 이 이상 뜸을 들이면 글 내용이 무엇인지 유추하느라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는 시점이니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이 기억은 내가 전 연애를 끝내던 날, 정확하게 말하자면 헤어지던 날의 기억이다. 아주 긴 연애였는데 심지어 몇 번의 헤어지자는 말을 번복하며 이어온 연애에서 연인에게 또 한 번 차인 후 붙잡지 않은 날 밤이었다.


헤어지자.

그래, 그러자.


그 말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그래, 그러자. 그 한마디면 될 것을 나는 뭐가 그리 두려워 그렇게 붙잡고 그 관계를 어떻게든 유지를 시켰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만큼 그러자고 말한 이후에 닥쳐온 미지의 밤거리는 너무 매력적이고 매혹적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연애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연애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느낀 해방감과 자유는 방종함을 원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원하는 것을 타인의 제어나 허락 없이 그저 나의 결정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만끽함에서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그 연애관계 속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던 문제는 전 연인이 무척 외롭고 감정 기복이 요동치는 사람이며, 그 감정적 문제들을 나를 제어하면서 해결하고자 했다는데서 왔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내 성향이 어떤 문제를 맞부딫혀 해결하기보단 나 자신을 억누르며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라는 데서 더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그러니 이 글을 통해 그 연애의 문제점을 고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양측 모두 미숙했고 시간이 미숙함을 해결하곤 하니까. 그런 모든 관계들이 나를 만들고 일구고 가끔은 자기 파괴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창출하기도 하니까 전혀 무쓸모 했던 시간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다만 그 밤에 느꼈던 해방감은 내게 큰 의의를 주었다.


결국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도 타인이라는 것이었다.

사랑한다는 말로 대충 둘러대며 이 정도는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해보다는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아, 나 엄청 참고 있었구나.'

머리카락이 쭈뼛 설 것 같던 자유를 피부로 느끼며 내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했던 생각이었다. 아, 나 엄청 참고 있었구나, 그래 이런 시간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었구나.

전 연인이 정말로 싫어하던 것 중에 하나였다.

나 혼자 카페에서 책을 읽기.

왜였을까. 왜 그렇게나 싫어하고 계속해서 핸드폰으로 문자를 하며 책 한 장을 편히 넘기지 못하게 했을까. 왜 결국 이상한 트집을 잡아 문자로 싸움을 계속하다가 녹초가 된 심정으로 몇 장 읽지도 못한 책을 들고 카페를 나서게 만들었을까. 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른다. 설명이야 들었겠지만 납득이 안 되니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다.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먼 기억이니까.


어쨌든 상대가 싫어한다면 하지 않는 것이 연애의 기본이라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상대가 싫어하는데도 억지로 무언가를 할 만큼 고집이 세거나 열정적인 사람도 아니니 의외로 고분고분한 성향 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날 결심했던 한 가지는 내가 지금 아내와 살아가면서 되도록 지키려고 늘 되새기곤 한다.

'당신이 내가 그날 밤 느꼈던 해방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고 싶어.'

아내는 이상한 생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헤어지지 않을 건데 무슨 그런 생각을 해, 그렇게 조금 불만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은 무척 개인적인 마음가짐이다.

나는 아내에게 무언가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내 부모처럼 굴고 싶지도 않고 내가 맞추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 만났던 전 연인처럼 굴고 싶지도 않다.


아내는 나와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로서 지내고 있지만 그 모든 관계를 떼어놓고도 아내 그 자신으로서 생활하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사람이 인간관계를 통해 변해가거나 맞추기도 하고 물러서거나 나아가기도 하는 그 모든 움직임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람하고 사는데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만 하겠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말이 맞는 말인 것도 분명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 밤 누군가와의 긴 연애가 끝났다는 슬픔보단 해방감이 컸던 기억이 명확하게 남아있다. 그저 카페에서 책 한 권을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고, 누구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읽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좋아서 눈물이 날 뻔할 정도였을 것이다.


나는 늘 아내에게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싶다.

내 곁을 떠나서 얻는 해방감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삶에서 아내가 느끼고자 하는 것들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반려이고 싶다. 


물론 나의 아내는 신뢰가 가능한 배우자이고 그렇기에 이런 다짐을 쉽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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