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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May 17. 2020

가지 않은 길은 누구에게나 있다

부부로 살게 되기 이전의 삶을 잠시 돌아볼까요


어릴 적 엄마의 일기장을 본 적이 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20대 중후반이던 그 어린 여자의 일기장에는 아이를 가지고 원하던 삶을 포기했다는 피로감이 눅진하게 묻어있었다. 그것은 어린 나이였던 내게도 다소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충격보다는 조금 안타까운 심정으로 억지를 부리는 마음이 되곤 한다.

그렇게 괴로웠다면 왜 포기했어, 죽을힘을 다 해 붙잡았어야지, 나 같은 건 치워버리고 원하던 삶으로 뛰어들어 아이가 생겼던 것조차 잊을 만큼 몰두하며 마음껏 생을 불태워보지 그랬어.

물론 억지스러운 마음이다. 갑작스럽게 들어선 아이의 무게가 그 어린 나이의 엄마를 얼마나 공포로 짓눌렀을지 알 수 있다. 정말 싫지만 같은 여자라 더 피부로 느껴지는 공포감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아주 끈적하고 느린 듯 빠르게 흘러왔다.

뱃속에서부터 엄마의 몸무게가 40킬로도 되지 않도록 빠지게 만들 만큼 못돼먹었던 나는 이제 그 당시의 엄마를 떠올리며 씁쓸해하는 30대의 여자가 되었다.


엄마의 삶이 가지 않은 길로 얼룩져가며 고통을 삼키고 걸어온 것이었다면 나의 삶은 어땠을까.

가지 않은 길은 누구에게나 있으니 말이다.



내 나이대 딸들이 그렇듯 나 역시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원망과 함께 그럼에도 세상이 바뀌었으니 남자애들보다는 특출 날 수 있다는 기묘한 기대 속에서 자라났다.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들을 대부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하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조금 독특했다면 기이할 정도로 강하던 승부욕과 투쟁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것을 빼앗기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아이였고, 성별의 특성을 들어 네가 가끔은 져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분위기엔 온 힘을 다해 저항하던 아이였다.


힘으로 못 당하는 아이에게는 또래 친구 집단을 선동하고 압박해서 반드시 사과를 받아내거나 선생님의 권력을 이용해서 벌을 받게 만들었다. 특히 "쟤가 널 좋아해서 그런가 봐."라는 어른들의 변명이 따르곤 하던 남자아이들의 폭력을 당하면 그 애를 흠씬 두들겨 팬 후 "저도 쟤를 좋아해서 그래요."라고 대꾸하는 등 타고난 파이터였다고 전해 들었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 중학생 무렵이 되었을 때 바야흐로 연애의 기운이 여기저기 몽글거리며 피어나는 것을 겪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해보니까 슬몃 발을 딛었다가 영 아니라서 일주일 만에 손 한번 잡지 않은 남자 친구에게 "우린 아무래도 아닌가 봐."하고 이별을 고하기도 했다. 나는 그냥 친구들하고 어울려 노는 것만 좋은데 남자가 꼭 껴야 할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단편적인 기억들이 모두 나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물쭈물하거나 게으른 면도 있었고 단호하지 못한 기억도 꽤 있다.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도서관 책장 사이의 고요하고 어둑한 부분이었고 떠들썩한 자리는 머리가 아파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고요하고 평범하게 흐르듯 살아가겠구나 내심 생각했던 기억도 있다.


지금의 삶이 고요하고 평범하게 그냥 흐르듯 사는 삶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어느 순간의 갈림길에서 내가 선택한 길과 선택하지 않은 길의 간극이 무척 컸겠구나 갑자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지금의 아내에게 마음이 뛰던 어느 비 오는 날의 우산 속 같은 기억이 바로 그런 갈림길처럼 떠오르는 날이다.


당시 나는 긴 연애를 끝내고 푹 쉬던 중이었다. (저번 글에도 썼던 것 같은데 바로 그 연애 휴식 시기였다.)

그러던 중 카페에서 일을 하다 일 년에 몇 번간을 만나던 여자친구를 불러내었다. 마침 심심하다고 하기에 내 일이 곧 끝날 것 같으니까 카페에서 보자고 갑작스럽게 말해버렸던 것이었다. 딱히 혼자 뭘 하려고 카페에 나간 것이 아니기에 가볍게 만나서 수다나 떨다가 집에 가자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카페로 반팔 티셔츠를 입고 걸어 들어올 때 나는 어쩐지 완연한 여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공기뿐만 아니라 그냥 저 사람 자체가 여름인 것 같네, 그런 감상적인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배고프니 뭐라도 먹자고 길을 함께 나서던 중 어마어마한 빗줄기가 내려서 한 개의 우산만 펴서 같이 썼다. 왜였을지 모르겠다. 

같이 걷는데 가려던 음식점은 멀었고 어깨 한쪽은 젖었고 둘 다 반팔을 입어 우산 속 둘의 팔이 자꾸 스치며 피부의 촉감이 느껴졌다. 공기 속의 물기 때문인지 자꾸 숨쉬기가 불편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사실 그것은 긴장해서 심장박동이 빨라진 탓이었다.

손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이상하게 긴장되네.


물론 아무 일 없이 음식점에 도착해서 또 친구처럼 비가 어마어마하게 오네, 세상에, 비 너무 싫어, 이런 말들을 나누며 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 시점이 내게 갈림길처럼 느껴진 이유는 그 뒤에 자주 연락하며 갑작스럽게 퇴근길에 카페에서 만나거나 하는 등 연애 시작 전의 잦은 만남 같은 것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지금과 같은 삶의 양상으로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시점 20대 후반의 여자이던 내가 여자와 긴 연애를 끝내고 제일 먼저 한 생각은 내겐 지나치게 어려운 삶을 선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선택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불가항력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시기에 정말 많이 지쳐있었다.

전 연인의 성격도 한몫했고 더불어 긴 비밀을 지키느라 압박으로 온 마음이 짓뭉개진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부모와 한 집에 살면서 누구와 만나느라 그렇게 늦어지는지, 너는 대체 어떤 인간인지 모르겠다는 부모에게 시종일관 답변을 거부하며 나의 신경 줄은 항상 팽팽한 채로 유지되어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비밀이 사라지고 후련해진 삶 속에 살면서 처음으로 결혼 준비를 한다며 청첩장을 내밀던 친구가 부러워졌다. 너흰 항상 이런 기분으로 사는 거구나, 누구에게도 비밀 없이 그냥 이렇게 누굴 만나고 누구와 결혼을 하고 누군가와 살아간다는 것을 어디에서나 편안하게 내보이며 법적인 보호를 받으며 가족을 꾸려나가는 거구나.

그것 참 부럽네.


그렇게 시원하던 마음을 다시 비밀 속으로 욱여넣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 끝에 마침내 내가 그 빗속에서 우산을 함께 쓴 그녀를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는 걸 깨달은 날 혼자 새벽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좋아한다는 사실을 느끼자마자 겁에 질리고 눈물이 쏟아져 나올 만큼 겁이 나는 삶으로 나는 다시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그런 갈림길 몇 개를 지나 내가 선택했다기보단 운명처럼 끌려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마침내 가족은 아무도 모를 결혼식을 무사히 치르며 사랑하는 친구들과 감사한 하객분들의 축하를 받고 서로를 서로의 아내로 받아들였다.


혼인서약서를 읽으면서 또 그 새벽과 비슷한 울음이 터져 한참 읽어나가질 못하고 눈물만 펑펑 쏟았던 그 날, 나는 또 한 번의 갈림길을 지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의 충격과 같은 실감이 터져 나와 나는 길게 울고 또 울었다.


가지 않은 길이 없는 이는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중요한 선택의 기로는 있고, 선택을 했기에 또 이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날의 나의 선택이 옳았는가 묻는다면 그것은 죽음에 다가간 나만이 답할 수 있다. 누가 내게 뭐라고 한들 그것은 별로 중요한 평가 지표가 되지 못한다.


두렵고 겁이 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내가 나를 믿으니까, 나는 나를 가장 좋은 길로만 안내할 것이다. 

타인을 잊고 나만을 떠올리며 내가 결국 당도할 죽음 앞에서 "그래도 그럭저럭 마음 내키는 대로 잘 살고 가네."하기 위한 삶을 산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게는 아내가 있다.

부모도 직장에서도 모르고, 법 안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다정한 나의 가족이 내게는 있다. 


몇 개의 갈림길을 지나오며 나는 나만의 가족을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후회는 한 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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