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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은 Nov 06. 2024

연륙교 생기기 전, 교동도를 걷다

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창후리선착장에서 자동차와 일행을 실은 배는 반 바퀴 방향을 돌려 교동도 월선포로 향한다. 2층에서 내려다보니 우체국택배 차량이 타고 있다. 누구에겐가 전해지길 기다리는 소식과 사연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을 것이다. 배는 직선으로 가지 않고 좌우 구경하듯 번갈아 몸을 틀며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동도에 나를 내려놓고 배는 다시 멀어진다. 

  오늘 16킬로미터를 걸을 예정이다. 걷는 데 맛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일상에서와 다른 존재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어디를 가기 위해서,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걷기가 목적이다. 2월 말, 양지는 달라진 햇볕에 기지개를 켜며 생명을 밀어 올리고 음지는 아직 흰 눈이 그대로 쌓인 채 얼어있다. 움직이는 자동차를 하루 종일 두 대 보았다. 화물차가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서 있다가 출발한다. 다소곳이 낮은 지붕들은 세월과 함께 기울고, 군데군데 낡은 속살을 드러낸 빈집은 부끄러움 잊어버린 여인 같이 흐트러져 있다. 걷는 들길 옆으로 논밭이 이어지고 띠를 두르듯 길이 지나고 둑 너머 바다가 섬이란 걸 일깨우듯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였다. 나른하던 교동향교가 기다렸다는 듯 반긴다. 옆집아저씨 같은 분이 잠겼던 문을 차례로 열며 안을 둘러보도록 비켜선다. 공자와 유현의 위패를 모신 제사 공간(대성전)과 학교 공간(명륜당)으로 구성된 것은 여느 향교와 같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선 향교라는 설명이다. 대성전 서쪽 담 옆으로 샘이 하나 있고 바래가는 붓글씨의 낡은 나무게시판이 그 앞에 서 있다. 오래전부터 약수(藥水)로 알려졌다고 쓰여 있는데 지금도 그러한지 싱거운 의심이 들었다. 

  지난가을 떨어진 잎이 발밑으로 수북한 화개산 속으로 들어갔다. 길 아닌 길을 지나 햇볕 왕성한 화개사 앞마당에 올랐다. 소박한 절을 눈으로 한 번 둘러보고 발길을 산으로 옮겼다. 정상은 넓게 잔디가 깔려 있다. 산 아래 교동마을이 퍼즐처럼 반듯하다. 북한 연백평야가 보인다. 석모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인다. 바다 한가운데로 발을 뻗고 있는 공사현장도 들어온다. 육지와 교동을 잇는 저 다리공사가 완공되면 이 고즈넉한 한적함은 부쩍 밀려날 것이다. 내려오는 길은 가볍다. 돌무덤으로 보인 찜질방 동굴 속에 머리를 넣어본다. 위장병에 좋다는 옹달샘 약수터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떠 마시는 사람을 구경한다. ‘유배’ 단어가 주는 쓸쓸함으로 연산군 유배지 푯말을 눈으로 더듬어도 보았다. 

  여염집 같은 교동마을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망둥어찜, 방게조림, 비지찌개가 친정엄마 손길처럼 투박하면서 정이 묻어난다. 학교에서 돌아온 이 집 아들도 손님상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다시 걷기 위해 우리가 일어나자 주인여자도 식당 문을 잠그고 따라나선다.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리다 정착하게 된 대룡시장은 당시 모습을 벗지 못했다. 1960년대, 남루하고 배고프던 시절에 태어난 때문인지 내 동네인 듯 마음 가면서 정겨웠다. 국가유공자 문패가 달린 대룡장의사, 동산약방, 교동이발관, 교동다방, 대성양복점, 교동신발 등 가게들은 손님을 기다리기보다 다만 시간을 견디는 낯빛이었다. 이곳의 시간은 느린 걸음을 떼다 문득 멈추었다가, 다시 생각나면 조금 움직여보고 그러다 며칠씩 서 있기도 할 것 같다. 골목은 짧았다. 멀어지는 대룡시장이 유년의 기억처럼 애잔하여 쓸쓸하다.

  동네 개와 고양이들의 경계를 받으며 낮은 언덕을 넘자 드넓은 논밭이 눈과 가슴을 시원하게 열었다. 군데군데 불을 놓아 검게 그을린 논이 손대면 따뜻하겠다. 지난겨울 날 선 바람이 거짓말처럼 풀어져 제법 보들보들하다. 채마밭에 덩그렇게 서있는 교동읍성을 지나 철근으로 입구를 막은 우물 속으로 서늘한 시선을 던져 보았다. 바닷가로 나오니 나무상자 모양의 북한 목함지뢰를 주의하라는 현수막과 안내판이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강화도 역사를 잠깐 상기시켰다. 남산포 어귀 뭍으로 올라앉은 짱짱한 닻 앞에 앉아 하늘과 닿아있는 바다를 눈으로 더듬어 보았다. 옛날 배가 닿던 그대로라는 동진포와 얼음낚시 흔적이 살펴지는 웅덩이를 지나자 갈대밭과 나란한 방죽이 부드러운 손길을 내민다. 

  어깨높이 갈대숲길은 방죽을 따라 길게 이어지다 월선포 가까이에서 멈춘다. 마른 갈대는 저희들끼리 수런거리다 나와 몸 부딪쳐 사르락 사르락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건너편 농로까지 건너가 지나는 이를 건드린다. 한참이나 갈대를 헤치며 걷다가 일 미터 높이 방죽 위로 올라섰다. 갈대를 밟고 올라선 높이로 바닷물 빠져나간 갯벌이 절벽 같은 깊이를 주었다. 어질어질 중심이 흔들려 여간 긴장감 있는 게 아니다. 양팔을 벌려 중심을 잡으며 방죽 끝까지 걸어가 다시 길로 내렸다. 

  밭 언저리를 돌아나가니 처음 걷기 시작한 지점이다. 막배를 기다리고 있다. 1972년에 전기가 들어오고, 2003년에야 인터넷이 들어온 곳. 신문보급소가 없어 관공서에 우편으로 오는 신문 말고는 보기 어려운 교동은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문명에 관심 없어 보인다. 저 건너 창후리선착장이 손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 보이지만 이곳은 자유롭게 육지로 나설 수 없는 섬이다. 섬이 주는 한계성, 그 외로움 때문일까, 멀어지는 월선포가 두고 떠나는 정든 이처럼 애틋하다. 

  하루 또는 일 년을 일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교동도와 살았던 오늘, 오래도록 행복한 생으로 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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