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여행에서의 좋은 기억을 갉아먹으며 일상의 고달픔을 견뎌낸다고 했다. 나도 5년 전 처음 홀로 떠났던 제주 여행의 좋은 기억을 잊지 못하고 일상에 시달리다가, 1년에 적어도 한 번은 제주 땅을 밟고 있다. 이제 제주는 아무런 계획 없이 준비 없이 떠나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올 자신이 있지만, 이번 일본 여행은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나에게는 첫 발자국인 만큼 이번에도 좋은 기억을 남기기 위해 나름의 준비를 했었고, 우연을 가장한 충동적 필연으로 떠난 여행치고는 다행히 아직까진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기억들이 사라지기 전에 허접한 사진들과 조잡한 글로써 유치하지만 나름 진지한 여행기를 남겨보고자 한다.
일본 여행의 시작은 제주항공 찜특가였다. 늦잠을 자는 평소와는 달리 눈이 일찍 떠진 그 날,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왜 10분이 넘는 접속 대기시간을 뚫고 제주항공 홈페이지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인천-오사카 편도 3만 원'을 보자마자 왜 나도 모르게 결제를 해버렸는지도. 오사카가 어디 붙어있는지는 물론 교토가 옆에 붙어있다는 것도 항공권을 결제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신분이지만, 어찌어찌 국외여행 승인을 받고 첫 여권을 만들고 정신을 차려보니 4월 3일 새벽 인천공항에 서 있었다.
처음 가 본 인천공항의 규모에 놀라기도 잠시,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온 피곤 탓에 공항 사진을 겨우 몇 장 남기고 9시 비행기에 탑승해서도 롯데월드타워를 본 이후로 기억이 없다.
처음 우리나라가 아닌 땅을 밟고, 간사이 공항에서 난바 역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그 풍경을 보는데 말로만 듣던 '일본 특유의 분위기'가 열차 창 밖으로 계속 펼쳐지고 있었다.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살, 아파트 하나 없는 한가로운 주택가. 특히 짱구 만화에서 많이 보던 좁은 주택들이 늘어져 있는 게 너무 좋았다.
난바 역에서 내려 숙소에 짐을 풀고 나와 주변을 돌아봤다. 출발 전부터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도톤보리는 그 기대보다도 이하였다. 2시간 정도 주변 골목 구석구석을 돌았는데, 역시나 먹방과 쇼핑을 즐기지 않는 나 같은 여행자에게는 맞지 않는 곳이었다. 길은 지저분하고 사람은 많고 정신없고. 결국 숙소로 돌아가 2시간 정도 낮잠을 청했다.
원래 계획은 저녁에 우메다로 이동해 '나카자키쵸의 카페거리'와 '우메다 스카이 빌딩의 공중정원'을 보러 가는 것이었는데, 잠을 깰 겸 숙소 라운지에 앉아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가 '아베노 하루카스 300(ABENO HARUKAS 300)'이라는 곳이 눈에 띄어 급 일정을 변경하고 텐노지 역으로 향했다.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오사카에서의 하루는 망했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60층 전망대에 내리자마자 1500엔의 입장료는 바로 잊어버릴 정도의 전경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동서남북이 모두 창으로 되어있어 일몰 시간에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제자리에 오면 또 다른 모습이 펼쳐져 있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빛 때문에 야경을 찍기에는 좋지 못했지만 3시간을 넘게 머무르면서 눈에 한가득 담고 왔다.
다음날 아침 숙소를 나와 난바 역-우메다 역을 거쳐 교토 가와라마치 역으로 향했다. 출근 시간대에 난바 역에서 우메다 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는데, 처음에 모르고 여성전용 칸에 타버렸다. 다행히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내렸는데 여성전용 칸에 타는 줄에 서서 열차를 기다리고, 열차에 타 있는 동안 눈치를 주거나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식은땀을 쓸어내리며 이 친구들은 원래 이런가 하고 생각했다.
가와라마치 역에서 숙소인 '피스 호스텔 산조(Piece Hostel Sanjo)'까지는 10분 정도 거리였는데, 바둑판식의 골목으로 되어 있어 두 지점을 오갈 때마다 늘 다른 길을 이용했다. 매번 다른 골목 풍경을 담을 수 있어서 좋았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다시 나와 버스를 타고 1시간 거리의 아라시야마로 향했다. 사람 정말 많았다. 교토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덕분에 이후에는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벚꽃나무가 만개하지 않아서 10그루에 한 그루 꼴로 있는 만개한 나무마다 20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면 '아, 저기에 만개한 벚꽃나무가 있구나'라고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도 얼른 가서 거들었다. 아라시야마에는 중국인보다 서양인이 더 많아서 놀랐다.
아라시야마에 내려 1시간 동안 사람이 없는 좋은 풍경을 찾아 돌아(도망)다니다가 정신을 차리고 치쿠린과 텐류지(天龍寺)로 향했다. 돌아온 나를 환영하듯 수많은 인파가 치쿠린에서 나를 맞이했다. 높게 뻗은 대나무 숲 사이로 흙길이 참 멋졌는데 인파 덕분에 사진으로는 담지 못하고 내 발 밑의 흙길만 눈으로 담고 왔다. 텐류지는 입구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
아라시야마 역에 있는 'Tully's Coffee'에 들어가서 1시간 동안 요양을 했다. 맞은편에 한국인 가족들이 앉아있었는데, 한국말이 들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계속 쳐다보게 됐다. 교토에 와서는 하루에 한국인을 10명 정도 봤는데, 여행 둘째 날까지는 주변에서 한국말이 들리면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가 눈이 마주쳤다. 뭔가 창피한 느낌에 셋째 날부터는 목에 힘을 주고 안쳐다보려고 노력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