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보여준 양보와 사랑의 방식
귄터가 천국으로 간지 3년째 되는 해이다.
귄터가 옆에 없이 이리는 외롭고 힘들거라는 생각에 매년마다 독일에 한 번씩 찾아가고 있다.
올 해(2025년)에는 8월의 마지막주에 이리와 귄터를 보러 갔다.
8월은 귄터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가 활짝 가득 피는 때이기도 하고, 마당의 블랙베리를 수확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리는 류마티즘 관절염을 30년 이상 앓고 있어서 블랙베리를 따는 건 귄터의 몫이었다. 작년에는 그 역할은 내가 했다. (2024년 블랙베리쨈을 만드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야기와 영상도 올려야겠다.)
여느 과실수가 항상 변수를 가지고 있듯이, 올해는 블랙베리가 전혀 달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기후영향과 나무 컨디션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나한테는 다르게 보인다. 하늘에서 귄터가 보고는 이리 힘들지 않게 일부러 블랙베리가 달리지 않게 한 것 같기만 하다.
한 여름인데도 이리는 몸 전체에 근육과 지방이 전혀 없어서 항상 춥고 외출이 어려운 상태다.
나이가 들어서 아주 약해졌다고 하는데, 인생의 동반자가 옆에서 사라진 이후로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졌다.
우리는 벽난로에서 나오는 따스함과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에 앉아있으면 시간이 멈춰있는 듯 하다.
거실과 주방에는 1890년대부터의 가구와 접시들, 서부개척시대때 쓰였던 권총, 초기 사무라이들이 쓰던 목검, 150년도 넘은 괘종시계가 15분마다 종을 울리고 실존하지 않는 귄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난 여기와 이 시간이 좋다.
귄터와 이리는 둘다 산업디자인을 공부하고 1960년대 독일의 전자기업 지멘스란 회사에서 만났다.
그 당시 지멘스는 획기적인 전자제품회사였고, 둘은 성실하고 훌륭한 아이디어와 기획력으로 인정받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귄터는 냉장고의 디자인을 바꾸는 일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은 바뀌어야하는데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어디서 시작해야 하지? 그 결론은 바로 '어린이' 들이었다. 귄터는 훗날에 이렇게 말했었다.
"이제 돌이켜보면 나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지만 많은 어린이들에게 더 나은 놀이 가능성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아주 많이 바꾸었다. (귄터가 세상에 기여한 이야기는 또 따로 기록해야겠다)
그래서 귄터와 이리는 결혼을 하고, 작은 마을에 있는 마굿간과 붙은 집을 사서 모두 고치고 살았다. 그리고 귄터는 어린이를 위한 가구와 놀이기구, 놀이터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이리는 자연스럽게 육아와 살림, 옆에서 서포트를 하면서 일과는 멀어지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리도 훌륭한 디자이너였지만, 둘 다 일에 집중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고, 그런 이리의 선택을 귄터는 항상 아쉬워하고 미안해했다.
집 구석구석을 보면, 그가 부인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싱크대와 조리대는 작은 키의 이리에게 맞추어 일반 사이즈보다 낮다. 설겆이는 귄터의 몫이였기에 그는 항상 구부정한 자세로 설겆이를 하면서도, 이리가 편리해서 본인은 하나도 안 불편하다고 웃어보였던 모습이 생각난다. 식물과 새를 사랑하는 이리를 위해서 만든 윈터가든에는 겨울에 따뜻한 햇빛이 들어오고 턱이 있는 곳에는 낮은 계단을 만들었다. 1층에는 각자의 방이 있고, 2층은 온전히 이리를 위한 공간이다. 이리는 이 곳을 이제 자신의 작은 성 (My little castl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빛을 좋아하는 이리를 위해 지붕경사를 이용한 하늘창을 만들고 여러곳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2층으로 올라오면 천국에 온 것 같이 밝고 하얗고 포근하다. 이리는 이곳을 스튜디오처럼 꾸미고 책을 읽는 편안한 소파와 편지를 쓰거나 공부를 하는 책상을 두었다. 그리고 큰 거울 뒤에 숨겨진 공간으로 연결되는 문을 만들었는데, 그 뒤에는 비밀 공간이 숨겨져 있다.
건축가도 아닌데 어떻게 마굿간을 이렇게 훌륭하고 사는 사람에게 가장 적합하게 고쳐서 쓰고 살았는지 대단하고 참 배려깊고 세심하다.
이리는 젊은 시절에 동화책을 몇 권 집필한 적이있다. 그녀는 평소 편지도 굉장히 시적으로 쓰는 편이라 항상 글이 아름답다. 자녀들에게 어릴적 들려주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든 '부엉이 이야기'이고,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대해 쓴 'Blue hour' , '날개 이야기' 등이 있다. 그녀의 책이 특이한 점은 그림은 그리지 않고, 종이를 오려서 흑과 백의 부분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너무나 감동받아서 한국판으로 출판 해 보고 싶기도 하다.
어두운 밤, 우리는 벽난로에서 새어나오는 빛과 귄터를 위해 켜 놓은 촛불에만 기댄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귄터의 아름답고 유쾌한 말과 글로 그가 동화책을 썼다면 아이들이 많이 좋아했을텐데.. 그쵸?"
"귄터는 일부러 동화책을 쓰지 않았어" 이리가 말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왜죠?"
"그건 귄터가 나에게 남겨준 세상이었거든. 본인은 놀이터 디자인만 할테니 글은 내가 쓰라고.."
귄터가 이런 말을 했었어. "그건 당신의 영역이고 당신만의 세상이야."
이리도 알고 있었다. 귄터가 동화책을 쓴다면 정말 잘 썼을거라고. "그는 너무나 맑고 상상력이 풍부하니까. 정말 잘 했을텐데 나한테 양보하고 전혀 안 썼어." 딱딱한 놀이시설 규정, 가이드라인 같은 걸 썼었지.
그리고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했다. 출판도 하고, 활동도 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지금은 너무 늦었다고..
"아니예요, 늦지 않았어요! 내가 도울께요. 같이 세상에 꺼내 봐요!"
" 아니야..이제는 연필을 손에 쥘 수도 없고, 아이패드를 펜으로 눌러가며 이메일 쓰는 것조차도 힘들어 졌는걸...
이리의 아름다운 글과 종이그림이 널리 세상에 꺼내어지면 좋겠다.
귄터도 그걸 바라고 있을텐데..
귄터가 이리와 세상을 나누는 방법 중 하나였었다니..
다시 말하자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이리가 하는 일은 '책' 이었다.
오늘도 귄터를 위한 초를 밝히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