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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재 Jul 08. 2022

4살이 39살에게 물었다.
"엄마는 꿈이뭐야?"

존재독립을 생각하게 된 시작

[독일에서 살아남기-아이와 단둘이서]

원고투고를 준비하면서 이 책을 왜 쓰게 되었는지, 어떤 내용인지 요약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시작한 글이다.

그런데 쓰다보니, 내 인생의 긴 시간을 되돌아보는 프롤로그가 되어버렸다. 


내 나이 39살 때까지 혼자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러고보면 지금도 세트라 그러하다)

부모님 집에서 2시간씩 통학하며 대학교를 다녔고, 1시간 30분거리를 지하철 타고 회사를 다녔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 살았고, 아이를 낳고 셋이서 살았다.

항상 든든한 지원자가 곁에 있었고, 의지할 수 있었다.

나는 연약한 존재인 줄 알았다.

39살, 혼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아이와 한 셋트로 혼자다.

나는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야 하고, 강해야 했다.


아들이 4살이 된 평범한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엄마는 꿈이 뭐야?"


갑자기 '쾅'하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였다. 

내 아이는 어떤 사람이 될까? 꿈이 뭘까? 뭘하고 싶어? 항상 궁금하고 물어보았었지만, 정작 나는 꿈을 생각해 본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나고....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나....꿈이 뭐지? 뭐였지?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이 질문...


내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로까지 찾아갔다.

11살부터 국악부에서 거문고를 배웠고, 연습벌레인 나는 3년동안 재능을 인정받아 다른 악기들과의 합주를 즐기면서 보냈다. 선배언니가 무서웠지만 잘했고, 재밌었다. 선생님께서 국악중학교로 진학을 추천하셨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일반 중학교에 가면서 거문고와 헤어졌다. 

중학교 시절에는 명성높은 방송부에 4차 면접까지 어렵게 통과해서 학교방송국에서 영화음악을 맡았고 시낭송을 했었다. 음악을 좋아했고, 영화를 좋아했다. 청소시간에 교장선생님 몰래 '서태지와 아이들' 음악을 트는 쿠데타 선동자가 되었지만 학생들에게 쉼과 활력을 주는역할이 좋았다. 그땐 라디오 DJ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갔는데 방송부가 없다.. 연극부에 들어갔다. 무대소품의상을 맡고 매일 늦은 시간까지 지하연습실에서 고교시절을 보냈다. 연극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연극을 위한 무대를 만들고 준비하는게 좋았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서는 외교관, 대사관, 관광청에서의 역할이 끌려 도전했지만  꿈과 현실의 갭을 실감하며 실패와 좌절에 부딪혔다. 마지막으로 도전했던 것이 '국제회의 기획사'였다. 

그리고 결혼하면서 나의 꿈은 '현모양처'로 바뀐다.

집 안의 가장이, 남편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고, 그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아이를 잘 키우는게 내 역할이다. 나는 내조를 잘해야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무슨 세뇌를 당했나?


아들의 짧은 질문에 내 기억은 이렇게나 긴 내 인생의 발자국을 밟고 다시 돌아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어디로 간거야? 언제부터 공중부양된거야?

"나는 나지! 모든 사람은 각각 독립적인 존재로써 소중하고, 개성있고, 생각과 계획이 있고, 그런 존재들이 모여서 가족도 되고, 친구, 모임, 직장이 되는거지.. 내가 먼저 있어야 세상도 돌아가는 것이고,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아니야?"


그 날부터 나는, 나를 알아가고 나를 만나려고 노력했다. 솔직해지려고, 꾹꾹 눌러놓은 저 깊은 곳의 민낯의 나를 찾고 싶었다. 


나는 절대로 연약한 존재가 아니였다.

4살때,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호떡을 좋아하니 호떡아줌마 딸인가보다' 라는 말에 용현시장에서 호떡파는 아줌마 옆에 앉아서 "아줌마가 우리엄마예요?" 라고 묻는 돌직구였고,

7살때, 집에서 30분 거리의 유치원을 혼자 걸어다닌 용감한 꼬마였고,

8살땐 친구를 괴롭히는 녀석들은 모조리 혼내주는 정의의 용사였고, 

13살땐 전혀 안씻는 친구, 남묘호랭계교에 빠진 친구 등 학급친구들이 혐오하며 피하는 아이들은 내가 자청해서 짝꿍 자리에 앉았던 열린 마음의 소녀였다.


나는 강하다. 그리고 엄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꿈을 찾기 위한 무모한 독립은 아주 멀리서 시작했다. 그때는 그래야만 했었다.

언제나 내편인 부모님도, 월급 잘 나오는 안전한 직장도, 힘센 남편도, 따뜻한 집도, 익숙함과 편안함도 모두 내려놓고 뒤로 한 채 빈 몸으로 떠났다.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언어도 통하지 않는 모든게 새롭고 어려울 독일로 떠났다.


나도, 내 아이에게도 아마도 힘들지도 모른다.

꽉 차 있던 부분이 비어진 상태가 어색하고 불편하고 슬플지도 모른다. 하지만 빈 부분은 다시 무언가로 채워질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일테고, 그것을 채우려고 또 다른 노력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밝을 것이며 삶의 긍정에너지가 될 거라는 희망만 안고 갔다.

그렇게 나의, 우리의 독일에서 살아남기가 시작되었다.


"아들아, 그 날 엄마한테 물어봐줘서 정말 고마워.."

4살이 39살에게 던진 질문,

"엄마는 꿈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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