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다케오 온센역에 머무며 레지던시를 시작한 지 꼬박 14일째 날이다.
내 첫 레지던시 프로그램 경험이기에 굉장히 떨리고 긴장과 걱정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아침에 눈을 떠 어젯밤에 빨래를 널은 옷들을 정리하고 비타민 서너 개를 지난주에 산 녹차와 함께 입 속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가방에 담고 도서관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이제 제법 동네의 길을 알겠으며 지도 없이도 간단한 표식을 보고서 내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낯선 언어와 새롭게 마주하는 타국에서의 일상은 큰 자극이 되어 내 인생에 큰 동력이 된다.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들은 일상 속 작은 희열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배움에 즐거움이 이리 컸었다면 진작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할 것을 올해 만 31세를 하루 앞두고 세상 살아가며 크고 작게 배우고 깨우쳐 가는 일들이 너무나 재밌다.
일본의 북큐슈 로컬 기차를 처음 타는 일, 낮에 사람들을 구경하며 처음 맛보는 빵을 접하는 일, 해외 작가들과 이야기하며 내가 몰랐던 부분을 공유하고 알아가는 일, 다른 문화 속 행동을 보고 배우는 일 그리고 그것을 따라 해 보는 일.
레지던시에 와서 이 주만에 느낀 바들은 그렇다. 세상을 살아가는 시간들에 새로운 자극 한 스푼과 사색의 시간을 통해 나를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날들의 무한동력이 되는 일. 이러한 것들은 나만의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 나간다.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과 앞으로 어떤 존재로 살아갈지에 대한 생각들. 평화와 번영에 대한 고민들 그리고 이를 위한 노력들. 개인의 성장과 정말 사랑하는 일에 대한 잠시 쉼을 주는 것들.
작가로 바쁘게 살던 지난 시간들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게 맞나?' 하며 돌아보게 하는 시간들은 사실 익숙해져 버린 시공간에선 문득 하기 힘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한정적으로 주어진 이 시간에 감사하며 세상에 대해 삶에 대해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속으로 정리해 본다.
마음이 기쁘다는 표현은 이곳에 와서 느낀 점이다.
시간에 촉박하게 쫓기는 일이 없고 아는 사람이 적으니 누가 만나자고 하지도 않는다. 작업실은 자전저를 타고 8분이면 도착하고 마음에 드는 넓은 도서관은 15분이면 도착한다. 오전에 도서관에 들리기 전 자전거를 주차하고 근처 녹나무가 있는 신사에 들려 산책을 하고 도서관에 돌아와 스타벅스에서 계절 음료를 맛본다. 잡지와 동화책 다양한 책들이 있는 이 도서관 구석엔 조용히 공부하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 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어제의 하루 그리고 지난날들을 텍스트로 정리하고 사진을 뒤적여본다. 매년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내가 온 아트 이토야는 유료 레지던시라 신청을 하고 일정 돈을 내면 올 수 있는 곳이기에 어렵지 않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문제 되는 부분은 사실 금전적인 부분이 아니다. 여자 작가로서도 김연지로서도 내 할 일을 말끔히 해내야만 오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 할 일이란 작가로서 활동은 물론이고 딸으로서도 아내로서도 며느리로의 일들이다. 사실 내 역할의 점수는 스스로 평가하기에 낮은 점수를 매년 기록하고 있어 마음이 영 편치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무사히 2년째 재발 없이 건강검진이 잘 끝났고 나는 더 이상 긴급하게 의사를 만날 일도 없고 모든 가족들도 평안하고 전시도 잘 마무리해서 스스로에게 주는 상으로 왔다.
앞으로도 이렇게 무탈하게 살면 걱정이 없겠지만 인생이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고 한 치의 앞도 모르기에 매년 오겠다는 약속은 스스로에게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의 이 순간을 감사히 기쁘게 살고 있다.
하루하루 매일 쌓이는 얇은 기쁨들은 어느새 산더미처럼 한편에 쌓여 혹여 미래에 재앙이 물밀 듯 쏟아져도 유유히 떠오르며 충분히 삶을 힘을 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연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