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모킴 May 24. 2021

왜 토템을 수집하게 되었을까?

Chapter.1 : 일상을 담는 작업과 내 귀여운 오브제들 2

나는 1992년에 태어났다. 나무 위키에 따르면 내가 태어난 해는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는   전후로 태어난, , 세계 대전과 냉전을 겪지 않은 사람들을 ‘신인류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렇게 태어나며 얻은 첫 키워드는 ‘신인류’다.


어릴  기억들은 보통  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기억들이  있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는 . 97년도 IMF 당시 우리 집은 평창동의  작은 빌라의 반지하에 살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벽에 곰팡이가 피어 신문지를 붙였던 기억이 나고,  가족이 거실에 모여 잠을 자던 시기이다. 우리  말고도 다들 힘든 시기였으니 가진  없었고    있는 여유가 마땅치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어린 신인류 아이들은 가지고  것이 없었다.   전봇대 하나를 놀이터 삼아서 아스팔트의 부스러기들을 흙처럼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물론 오분 거리에는 작은 아파트 단지에 놀이터가 있었지만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거지라며 흙을 뿌리고 놀이터에서  놀게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아무튼 정말 집에 돈이 없었다.


내가 태어날 당시부터 97년도까지 TV에서 세일러문을 방영하였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좋아하는 취향이 생긴 시기라 생각된다.

 낮에는 평범한 삶을 사는 여학생, 밤에는 악당들을 물리치는 영웅을 좋아했다. 그 당시 나는 처음으로 가지고 싶던 물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세일러문 인형'이었다. 집 앞에 위치한 작은 문방구에선 쇼윈도에 작은 세일러문 인형을 배치해놓고 팔았는데 그 당시 가격은 이만 원이었다. 어린 마음에 어찌나 가지고 싶었는지 매일같이 사달라고 울며 애원했지만 결과는 내 것이 되지 않았다. 당시 가지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마음은 성인이 되어서도 애착과 애증의 씨앗을 동시에 형성하게 되었다.


초등학생이 되자 집이 여유로워졌다. 당시 내가 8살일 때 동생이 태어났고 인형은 아기의 몫이었다. '나는 어른스러워야지' 고작 초등학생 어린이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첫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것처럼 어른답게 행동했다. 어른들만 사용한다는 첫 개인 휴대폰을 가지게 되었고 나는 내 소유의 첫 신문물 시대를 맞이하며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의 고민거리도 휴대폰을 통해 쉽게 전화하고 소통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 가지고 있는 큰 고민은 바로 '부모님의 이혼'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2000년대의 이혼율은 아시아 역대 최고라고 보도를 했고 90년대와 비교하여 두배나 많은 커플들이 헤어졌다. 그리고 주변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불안감을 가지고 부모 관계의 부재나 불화에 울며 성장했고 때로는 상실감을 가지며 자랐다.   




초등학생을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자 슬 어엿한 청년의 모습을 띄웠다. 이성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내 첫 연애는 중학교 1학년 때 시작되었다. 풋풋한 연애 었다. 남자 친구에게 처음 받은 선물은 사슴 인형이었다. 평범한 인형은 내게로 와 애정의 증표가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인형이 첫 토템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물론 연애가 끝나면서 인형도 함께 버리게 되었지만. 그렇게 불안정한 연애의 시작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청소년의 시기를 보냈다. 다양한 관계 속 이성과 동성 친구들의 관계들은 무너지는 신뢰와 불안정한 심리를 접하게 되면서 크고 작은 감정들에게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게 형성되는 시기였다.


열댓 명 어울림을 좋아하던 어린이는 자라서 두세 명의 소수의 친구들을 만나길 좋아하는 청년으로 성장했고 불안정한 관계의 크고 작은 일에 괜히 휘말리기 싫어했다. 20대 뉴욕에서 생활을 하며 이러한 개인주의 성향은 더욱 짙어졌다. 언젠가 미국에서 그런 단어를 들은 적이 있다. 'Personal space'. 개인이 타인에게 침범당하고 싶어하지 않는,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점유할 공간이란 뜻인데 심리학 용어로 주로 사용된다. 타인이 자신만의 점유 공간을 침범하면 불쾌하게 느끼기도 한다. 개인주의 성향이 짙게 나타나는 뉴욕에서 성장한 내 작품의 주된 키워드이기도 하다.


20살이 되는 해에는 스마트폰이 생겼고 새로운 네트워킹 서비스들이 유행했다. 인사도 할지 안 할지 모르는 수백 명의 잘 모르는 친구들과 '팔로잉'을 하며 인간관계를 으스대고 싶어 했고 때로는 그런 불안정한 관계에 지쳐 클릭 한 번으로 쉽게 '언팔로잉'을 누르기도 했다. 이런 관계들은 화선지에 물 스며들듯 심리적 불안감을 조성했다.


뉴욕 거리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시위를 하기도 했고 바쁜 아침 사람들을 제쳐가며 한 손엔 커피를 들고 본인의 갈 길을 가기 바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뒤돌아보니 그들 속엔 내가 보였다. 숍에 들어가 물건을 볼 때면 나만의 조용한 쇼핑 시간을 깨버리는 말 거는 점원이 부담스러웠고 아무 노래도 들리지 않는 이어폰을 착용해 개인의 시간을 철저하게 보장받고 싶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눈을 마주치고 하는 대화보다 문자로 이야기하거나 바깥 풍경을 보며 이야기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언택트 시대의 개인주의 어른으로 거듭이 나있었다.



개와 인간의 역사는 길고 만남은 짧다. 생명이 있는 개를 입양할 수 있었고 많은 친구들이 주변에서 개를 입양해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언제인가 친구가 룸메이트와 헤어지게 되어 함께 입양한 개를 두고 누가 키울건지에 대해 갑론을박을 일으켰고 그 사이 개를 맡아줄 사람을 필요로 했다. 당시 나는 삼개월 동안 로키를 만났고 아직 그리워 하고 있다. 로키가 떠난 겨울,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뉴욕에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는 꽤나 로맨틱하다. 나는 그 날 메이시스 백화점에 갔다. 붐비는 사람들속 혼자 나는 세일하는 주방용품에서 '뉴욕'이를 발견했다. 퍼그 강아지 형상의 쿠키를 넣는 도자기였는데 나는 그 속에 쿠키대신 영혼을 넣었다. 그렇게 '뉴욕'은 우리집으로와 매일 같은 자리에 서있었다. 장식성이 꽤나 짖어 보이는 대량생산된 아이템이지만 애정을 붙이고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집을 지켜주는 의미있는 토템이 되었다. 이 것이 내가 토템을 모으게 된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장식물 역할을 넘었고 나는 사물들과 감정적 소통을 하며 안정감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나라에서 데려온 동식물 형상의 물건들은 토템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아 하나의 상징물로 존재한다. 각기 다른 토템들로 인해 안정을 찾게 되었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불안정한 인간관계와 몇번의 경제위기, 급변하는 시대상을 직접 겪고 자란 본인이 속한 이 세대는 작가를 포함해 불안한 심리적와 안정감을 필요로하는 이들이 많았다. 오늘 날 이 시대의 현대인들이 살아가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로하는 안정과 안녕 그리고 사랑을 담아 오늘도 열심히 작업..!  (급하게 마무리하는 이유는 집 가야함)

매거진의 이전글 현대 미술 재료로서의 아이패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