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女기자, 정글생존기-고통의 쇼는 시작됐다 국민투표는 희망고문이었을뿐
"타인의 고통만으로 더는 충분치 못한 순간이 왔다.
그들에겐 고통의 쇼가 필요했다"
-아멜리노통브 <황산 中>
99년생, 19살 소년이 마이크를 꼭 잡은 채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원했다.
하위권 연습생들로 구성된 팀이,
곡이 끝나기 전 퍼포먼스로 펼친 카드에 적힌 문구다.
대학생 때 읽은 아멜리노통브의
<황산>이 떠오른 건 그때다.
슈퍼스타 K부터 K팝스타 등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봤지만
왜 유독 이 프로그램에서만 이 소설이 떠올랐을까.
<황산>의 시작은 이렇다.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납치된다.
기준은 없다. 무작위다.
신분증을 없애고 등록번호가 새겨진다.
똑같은 옷이 입혀지고 수감된다.
이들은 '포로'라 불려진다.
포로는 강제노동에,
포로를 감시하는 '가포'의 핍박과 괴롭힘을 당한다.
이는 방송 관계자들이 계획한 '집단수용소'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포로의 모습은 생중계된다.
가혹한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는 포로들은 시청자 투표로 처형된다.
언론의 성토에도 시청자 반응은 뜨겁다.
우리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매회 소년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을 꼭 잡으며
간절히 기도한다.
기도가 통한 자는 등수가 매겨진 의자에 앉고 그렇지 못한 자는 다음회부터 찾아볼 수 없다.
기도가 통한 자는 등수가 새겨진 옷을 입고 나온다.
(줄세우기에 민감한 우리나라에서 '순위옷'이 논란이 되지 않는 것도..의아한 부분..)
함께 목숨걸고 싸웠던 친구들과의 이별에 슬퍼할 겨를도 없다. 또다시 목숨을 건 무대는 시작된다.
<황산>에서 집단수용소 프로그램이 방영되자 언론은 경악한다. 시청자도 분노한다.
"시청률을 위해서 이따위 프로그램을 만들다니"
포로들이 절망하고 처형될수록 시청률은 치솟는다.
<프로듀스 101>에서 회를 거듭하고
생존과 방출의 경계가 갈리는 순간
시청자들은 주목한다.
소년들의 눈물과 함께 울면서도
어떤 소년이 눈물을 흘릴지 궁금해한다.
그러나 이게 과연 공평한 게임일까.
매회 소년들에게 주어지는 분량은 다르다.
또 그 짧은 순간조차
소년들의 면면을 다 드러내지 못한다.
소위 '악마의 편집'이라는 것들에,
아이들은 난도질 당하고
그걸 보는 가족들과 팬들 역시
상처받는다.
물론 시간은 한정돼있고
재미를 위해서 편집은 필요하다.
편집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101명 아이들의 일주일을
'어떤 모습'을 '어떤 자막'과 함께
'어느 순간'에 넣느냐..
거기에 '어떤 의도도 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101명 소년들을 처음 보는 시청자라면
그들의 분량에 의지해 고정픽을 만들 수밖에 없다.
아마 101명 중에는 11회 방송 통틀어
1분도 채 나오지 않은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공평하지도, 공평할 수도 없는 오디션이었다.
국민 프로듀서님을 향해 뽑아달라며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간절한 눈빛을 보내지만
결국 소년들의 생사여탈권은
대기업 방송국 프로듀서님들이었고
시청률과 화제성을 동시에 잡은 이 프로그램은
내년에도 진행될 것이다.
101명의 아이들은 또 순위가 적힌 옷을 입고
순위에 따른 의자에 앉을 것이다.
"살려달라"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