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땐 모른다. 소중함을.
연인들의 명소 프라하 까를교.
손을 잡고 다리 끝까지 걸어가면
사랑이 이뤄진다 해서 더 유명해진 곳이다.
젊은이들 틈으로 머리가 하얗게 샌,
그러나 표정은
어느 젊은이들 못지 않게 생기발랄한 노부부가
눈에 띄었다.
야경을 찍던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할머니 머리를 카메라 받침대로 쓰려는 것.
장난치지 말라며 손을 내젓는 할머니를
끌어안으며 앞에 세운 뒤
카메라를 올려 사진을 찍는다.
두 분의 깔깔 거리는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하다.
..
나도 신랑과 저렇게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게 늙어갈 수 있을까?
디스크 진단을 받고
너무 우울해하는 나를 보고
부모님께서 기분전환 삼아
멀리 어디라도 갔다 오라 해서 가게 된 체코.
비행기 타는 것부터 힘들었지만
매일같이 숨 가쁜 하루를 보내다
집에만 처박혀 천장만 보고 있어야 하는 건
정말 고통이었다.
가는 곳은 병원뿐이었고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은 자존심 탓인지
친구들조차 만나고 싶지 않았다..
디스크는 죽을 병은 아니다.
그러나 겪어본 사람은 안다.
죽지 않을 만큼 괴롭다는 걸.
비싼 돈 주고 간 콘서트장에서 신나게 뛸 수도 없고,
킬힐을 신고 거리를 활보할 수도 없다.
성과를 내보려 해도 좀처럼 걷기도, 앉기도 힘들다.
노트북과 녹음기 등 각종 장비와 잡다한 물건이 든 가방을 메고 현장을 누빌 수도 없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밀고 당기던
아파트 현관문과 마트 대형 유리문에 도리어 내가 밀리어, 주저앉아 눈물도 참 많이 흘렸다.
할 수 있는 게 뭘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데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맘대로 부릴 수 없는 나를 회사에서 내쫓으려 하면 어쩌지?
시댁에서 큰 며느리라고 들였는데, 아들만 고생하게 생겼다고 싫어하면 어쩌지?
일은 계속할 수 있을까?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이 건강하다고 조상님 말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외유내강은 너를 두고 나온 말 같다"는 말을 듣고 살았던 난데,
"강철 같다"고 나름 자부하던 멘탈도
유리처럼 산산조각 났다
그저 앞이 깜깜했다. 막막하기만 했다.
날 이렇게 만든 회사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다른 애들은 안 아픈데 너만 아프냐,
니 몸 하나 관리도 못하느냐"는 말만 돌아올 뿐이다.
'노동-월급'이라는 계약으로 맺어진
냉혈한 사회에서 매 순간 내 사정을 배려받고 이해받기는 힘들다.
요즘같이 사람 쓰기가 쉬워진 세상에서,
만약 내가 비정규직이었으면
디스크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아마 짐을 쌌을 것이다.
일하려는 사람은 널렸다.
그런데 회사에서 뭣하러
아픈 사람 사정 봐가면서 일을 시키겠는가.
회사에서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를 떠나,
그래,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학창시절부터 대학, 취업만 바라보며
또 직장 안에서도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이 대가가 겨우, 디스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건 참 아팠다.
취미로 발레도 배우고 싶었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싶었다.
더구나 2세도 계획 중이었다.
디스크 없던 사람도 임신하면 허리에 부담이와
디스크 생긴다는데..
임신에 앞서 겁부터 난다.
이미 허리와 목까지 나간 나로서는
모든 것이 막막할 따름이었다.
자신이 없었다.
그저,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어쩌겠나. 이미 지난 일.
시곗바늘을 아무리 거꾸로 돌린다한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살다 보면 더 숱한 고비가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내 앞길을 막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디스크를 앓고 나면서부터 습관이 생겼다.
사람들의 바르지 못한 자세나,
척추에 좋지 않은 행동들을 볼 때면
그걸 그냥 잘 지나치지 못한다.
특히 의자게 앉을 때 다리를 한쪽 다리를 꼬고 있거나
엉덩이를 의자 끝에 걸친 채 고개는 쑥 빼고 컴퓨터를 하는 모습,
무거운 가방을 한쪽 어깨만으로 메거나
장시간 의자에 앉아만 있는 모습,
나의 잔소리 세포를 자극하는 부분이다.
"그러다 저처럼 돼요"
자리에 앉거나 일어설 때마다 '아고~' 앓는 소리를 하고
통증이 심한 날이면
구부정한 자세로 어기적 어기적 발을 내딛는 나를 보며
"얼마나 힘들겠니, 괴롭겠니"
안쓰러운 듯 사람들은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본인의 생활 습관을 고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저 디스크는 남의 일인 것이다.
그러다, 디스크 휴직한 기간 동안
쓴 돈을 얘기하면 다들 입이 쩍 벌어지면서
100이면 100, 허리를 곧게 쭉 펴고 의자를 당겨 앉는다.
"진짜 내 척추 잘 챙겨야겠다"며 그제야 꼬았던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다.
일을 안 하는 데 돈을 받을 리가 없지 않나.
문제는, 평소 고정지출금이 상당하다는 것.
각종 보험과 연금에, 적금.
그리고 매달 꾸준히 들어가는 휴대전화 요금과 경조사비에
먹고살려면 장도 봐야지,
고정지출금이 월 최. 소. 200만 원이다.
한 달에 200만 원씩만 잡아도 5 달이면 천 만원이다.
(따져보면 200만 원 이상 든 달이 더 많다.
설날, 추석 등 명절이나 가족 친지 생신까지 챙기다 보면
한 달에 300만 원을 훌쩍 넘길 때도 많았다.)
거기에다, 병원비.
장난 아니다.
아픈 사람들은 안다.
낫기 위해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을.
"용하다"는 병원은 전국으로 다 찾아다녔고,
목, 허리, 머리 엠알아이 비용에
(처음에 목 디스크인지 몰랐을 때 하도 1년 가까이 두통이 심하고 잠도 못 자서
뇌에 무슨 이상 있는 줄 알고 머리도 찍었다..-ㅅ-;;)
다른 병원 갈 때마다 또 엑스레이는 어찌나 찍으라고 하는지...
이런 기본적인 검사 비용에다, 물리치료, 도수치료비.
도수치료는 (겁나) 비싸다.
한 회에 2시간인데 시간당 10만 원으로
한 번 갈 때마다 20만 원을 내야 했다.
그렇게 총 20번을 다녔다. 400만 원이다,
다행히 실비 처리가 되긴 했지만
보험료가 갱신됐다.
게다가
침, 추나, 한약 등 한방치료는 보험이 되지 않는다.
휴직 뒤 4개월가량은 꾸준히 병원서 치료받느라
매달 50만 원씩, 모두 200만 원은 족히 썼다.
용하다는 민간요법 선생님들은
1회 10만 원 이상. (현금만 취급하셨다ㅠ )
병원 가는 횟수를 줄이고 재활 운동을 시작하면서
헬스장 등록비와 필라테스, 재활 PT비용까지.
드는 돈이 어마 무시했다.
나의 휴직 기간은 총 9개월.
그런데 월급이 없다.
다행히 이 중 3개월은 병가 처리돼 기본급은 나왔지만.. (물론.. 그게 어디였냐 마는..)
기본급이 고정지출금보다 적었기에, 여전히 힘들었다.
입사 뒤 연일 부족한 수면에 에너지 드링크로 연명해가며,
이기지 못할 술 마셔가며, 열심히 땀 흘려 번 피 같은 돈을
매달,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내야만 했다.
디스크는 죽을 병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무기력과 공포, 쪼들리는 생활은
무서운 속도로 끝없이 좌절시켰고 위축시켰다.
죽을 병이 아닌 나도 이런데
하물며, 암이나 백혈병으로 투병하는 분들은 어떨까..
병 그 자체보다 병으로 인한
심리적 위축과 우울, 좌절이 사람의 수명을 앞당긴다는 걸
뼈. 저. 리. 게 깨달았다.
건강은 공기와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비슷하다.
있을 때는 모른다. 그 소중함을.
없어 지면 그 때서야 안다.
후회할 때는 이미 늦었다.
아무리 노력 한들 그 전으로 돌릴 수 없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아픈 몸을 이끌고 힘겹게 간 여행이었지만
앞으로 살아갈 동안
더 많이 보고 즐기고 웃기 위해
무조건 건강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나도 할머니가 돼서
손 떨리는 신랑의, 카메라 받침대를 해주며
웃으며 까를교를 다시 건너는 먼 훗날을 그렸다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