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데이션 낀 팔자 주름이 익숙해진다는 것

서른여덞 워킹맘의 흰머리 단상

by 기자김연지

서른세 살 즈음이었을까.

5대 5 가르마를 탄 자리 끝 정수리에 뾰족 솟아올라온 짧은 흰머리를 처음 마주했다.

동공이 확대됐다. 귀신이라도 본 마냥,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비볐다 떴다.


현실을 부정했다.

'아니야, 빛에 반사된 것일 거야'

입으로 부정한다고 눈에 뵈는 게 바뀌진 않았다.


"일단 뽑고 보자"


핀셋을 들었다. 정수리에 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들추며 우뚝 솟은 흰머리 주변 검은 머리들을 꾹꾹 눌러가며, 흰머리로 추정(?)되는 한가닥을 추려냈다. 급격히 가치가 치솟은 검은 머리카락이 행여나 뽑힐까.. 숨을 참으며 한 가닥을 쑥 뽑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잘못 본 것이길.

빛이 바랜 것일 수도 있어서 검은 종이 위에 올려봤다.


인정해야 했다.




서른이 넘어 흰머리를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충격은, 출근길 곱게 펴 발랐던 파운데이션이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면 깊이 파여있는 걸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컸다. 팔자 주름은 쉽게 뭉치는 싸구려 파운데이션 핑계를, 혹은 워낙 많이 웃는 쾌활한 성격 탓으로 미룰 수도 있었으니까. 현실 부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검은 종이 위 확연히 대비되는 한줄기 가느다란 흰머리는 누구를 탓하고, 부정할 만한 여지가 없었다.


이후로, 흰머리는 잊을만하면 불쑥 존재감을 드러냈다.


'에잇, 또 난 거야?' 잡초 뽑듯 흰머리를 뒤적여 뽑아냈지만,

흰머리는 약 올리듯, 난 자리에 나고 또 나고 계속 나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수리 주변에서 시작된 흰머리는 씨를 뿌린 듯 주변 가닥으로 조금씩 퍼져나갔고,

가끔 머리 뚜껑(?) 들듯 옆머리를 들추면, 수줍게 한두 가닥들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결혼 5년 만에 어렵게 가진 아이가 만 4세로 곧 접어들고 뱃속에 있던 둘째가 나온지도 6개월이 다 돼간다.


자꾸 보면 반갑다더니 흰머리는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다. 나이 듦의, 특히 엄마 됨의 일부로 여기려 한다. 어렸을 땐 가지지 못했던 경험과 기쁨을 맞바꾸는 것이라 생각하려 한다.



집착을 버리면 행복해진다고 했던가. 자리를 제대로 잡아가는 주름을 파운데이션으로 억지로 덮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래 봤자 가려지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기에.


어렸을 땐 부모님의 유전자가 내 얼굴을 만들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드러난다.


흰머리와 주름에 대한 고찰은 "영원히 젊고 예쁘고 싶은 마음은 부질없는 욕망"이라는 걸 인정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곧 두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커리어도 쌓아야 하는 워킹(남매) 맘 세계에 접어들면서 더 늘어나고 깊어질 흰머리와 주름마저도 사랑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흰머리와 주름마저도 고상하고 우아해 보일 수 있도록 내 얼굴이라는 공간을 나의 후회나 미련, 또 욕심들로 채우지 않고 싶다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쌓여 일 년, 10년의 성과가 나오듯, 나의 하루하루 표정과 마음가짐이 나의 5년 뒤 10년 뒤 나의 인상을 만들 테니.


이런 글을 쓰면서도 이 결심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앞자리 숫자가 바뀌면 숫자 자체가 주는 편견과 강박에 두려움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버리면 비워둬야 하는데, 두려움에 또 무언가를 채우려거나 감추려 하지는 않을까.


고통을 피할 순 없어도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고 했다.

흐르는 시간을 피할 순 없다. 하지만 시간을 대하는 태도도 선택할 수 있다.


한 가지 똑같은 자극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다. 이는 개인이 가진 선택의 힘을 의미한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가져야 하는 것보다, 내가 '남길 수 있는 것을 고민하라'는 말이 있다. 끝까지 내 소유로 남을 마지막 자유는 ‘삶의 의미를 선택할 자유’다.


빅토르 프랭클에 따르면 강제 수용소 상황에서도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원망하고 비난하며 남의 것을 빼앗는 선택도 있었고, 희망을 이야기하고 타인을 위로하며 자기 것을 나눠주는 선택도 있었다. 인간의 품격은 그가 처한 상황이 아닌, 반응을 선택하는 그의 힘에 달려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쓰다 보니 어쩌다 서른여덟 흰머리 단상에서 출발해 강제 수용소까지 왔다. 그 흐름에서 어제까지의 나를 되돌아보고 오늘과 내일의 나를 상상해본다.


두배가 아닌 네배가 힘들다는 아이 둘 현실 육아 중이라 여러가지 생각이 더 오가는 듯하다. 풍요로워졌지만 아이 키우기는 더 각박해진 세상에서 둘째를 낳기로 했고, 그 아이는 이제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발산 중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내가 아이 둘을 키우면서 나로 설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그럼에도 좀 더 나은 삶의 의미를 선택하려 했다. 하나만 키울 땐 느끼지 못했던 기쁨과 황홀의 순간도 분명히 있을 것이고, 첫째와 둘째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나의 흰머리는 더 늘고, 주름은 더 깊어지겠지.

파운데이션은 아예 안 바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며 한 살 한 살 나이가 먹는 것을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잃고, 늙고 추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이 필요로 하는, 나보다 어린 후배들이 닮고 싶어 하는

진짜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군데군데 나는 흰머리를 뽑지 않아도, 주름을 억지로 감추려 하지 않아도

흰머리 마저 은빛으로 곱게 빛나는, 주름에서 인자함이 전해지는 그런 어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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