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쓸쓸할 때가 제정신 같아.”

[계절의 오행](2023)_18NOV22

by 정연진


봄이었던가, 우연히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3, 4편을 재방송으로 보았었다. 여차 저차 하여 지난봄, 한두 달 정도 집에서 티브이를 볼 기회가 생겼다. 이전에는 티브이가 없었다. 수업은 온라인으로 전환되었던 기간이었다. 일요일 오후인가, 수업에 사용할 드라마와 영화자료들 때문에 넷플릭스 아이디도 하나 받아두고 몇 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찾아보고 있었다.


[나의 해방일지]는 영화인가 싶게, 드라마치고는 화면도 어둡고 우울한 것이 [나의 아저씨] 분위기가 났다. 그날 처음 보았을 때 김지원과 손석구는 대화도 얼마 없고 이야기는 지루해 보였으나 점점 전개와 스토리가 기대 이상이어서 첫 편부터 다시 찾아보고 재방송도 다시 보고… 방송 기간 내내 재방송할 때 마다 채널 고정, 결국은 모든 에피소들을 여러 번씩 본 것 같다. 티브이가 있었던 한두 달 정도, [나의 해방일지]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도 한동안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대화와 스토리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구 씨”는 “손석구”라는 이름 못지않게 대중 속으로 파고든 이름이 되어 순식간에 광고 몇 개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는 아주 높아졌었다. 나중에서야 조금 실감했지만 드라마에 등장하는 스토리나 대사는 정말 남성성이 짙어서 곱씹어보면 또 이야깃거리가 많은 것 같다.


사실 인물들의 직업 등이 보통 사람들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나의 아저씨] 역시 극 중 주인공의 이미지와 일명 ‘후계 패밀리’, 삼 형제의 일상 등으로는 서민 드라마이자 잔잔한 여운을 주는 드라마로 꼽히지만, 다른 면에서는 또 무척 자극적이기도 했다. 흔치 않은 직업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보통의 드라마에 쓴다는 것, 음, 강렬한 인상과 대중성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계산된 의도와 필력에 대한 작가 자신의 자신감이라고 해 두자.


어젯밤, 다음 주 수업 준비를 핑계로 적당한 휴식을 위해 드라마 몇 개를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나의 해방일지] 마지막 편과 중간쯤 인상 깊었던 장면들을 몇 부분 찾아서 다시 보았다. 모든 책, 영화, 드라마가 그렇지만 같은 내용을 여러 번 읽거나 보다 보면 처음 보았을 때 느끼지 못했던 분위기와 인상, 놓친 대사나 장면들이 다시 보일 때가 있다. 평소 말이 없던 “염미정”이 “구 씨”앞에서 주저리주저리 자신의 이야기와 감정을 풀어놓을 때, 그리고 미정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구 씨가 경계를 풀고 철없고 평범한 젊은이가 되어 격 없이 대답할 때, 둘은 그저 동네친구 같다.


장면마다 다르긴 했지만 이 드라마는 결국 신비스러운 이방인구 씨가 핵심인데 보는 사람들도 배우 특유의 말투와 애쓰지 않은 듯한 연기와 발성에서 삼형제 가족과 동네 친구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매력을 느껴 가는 것 같다. 캐스팅을 기가 막히게 잘한 것이겠지.


결론적으로 구 씨는 남성들이 가질 만한 모든 로망의 결정체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미정은 오히려 현대 여성의 이미지를 깨버리는 털털한 시골 처자로 기억된다. 미정은 구 씨를 만나기 전과 후 자신의 인생이 달라졌노라고 독백한다. 사실 나는 구 씨보다는 미정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장면이 너무 강렬했다. 의도한 것이겠지. 구 씨가 떠난 것 그리고 삼 남매의 어머니가 죽은 것, 미정에게 그리고 미정의 가족들에게는 이 두 가지 모두 전회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


몇 편을 다시 본 [나의 해방일지]에서 어제 내가 발견한 대사는 “인간은 쓸쓸할 때가 제정신 같아.”였다. 쓸쓸하다는 말을 최근에는 말하거나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생소하게 들렸다. 아니 이것 말고도,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기쁘다거나 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많은 단어들을 최근에 들은 기억이 없다. 사람들과 이런 대화를 해 본적이 언제였던가, 사람들은 얼마나 감정을 표현해 보나… 메시지 대화는 폭발적으로 늘었다는데 감정이 오가는 대화들은, 적어도 나와 내 주변에서는 줄어든 것이 확실한 것 같다, 물론 말보다 이모티콘과 같은 아바타식 이미지들로 대체되기도 하겠지만.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구 씨가 알코올 중독이 된 이유를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인간은 쓸쓸할 때가 제정신 같다.(엥, 그럼, 쓸쓸하다는 말이 새삼스러운 이 느낌은, 외로움도 쓸쓸함도 못 느끼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제정신이 아닌 채로 사는 것일 수도!)(아, 나처럼 누군가 이렇게 반바퀴 더 돌려 사색해 버릴까 봐 드라마에서는 “그래서 밤이 더 제정신 같아.”라고 덧붙이기는 한다.)


[나의 해방일지] 다시 보기에서 또 하나 얻은 것이라면, 드라마에서 온통 잿빛이던 동네 분위기가 한밤중 구 씨의 방에서 새어 나오던 초록 불빛 하나로 그나마 삶의 온기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 상징은 구 씨가 등장한 이후 또는 구 씨와 함께 여러 번 활용된다.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신호가 있는 그곳이 경기도 산포시이건 100여 년 전 미국 어느 도시이건, 아메리칸드림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떠나던 사람들, 과거 한 때 자신을 살게 한 초록빛을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친 슬픈 개츠비의 이야기에서 초록 불빛이 주는 그 의미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던가. 구 씨는 그러므로 처음부터 미정이와 미정이네의 진짜 해방을 위한 도구가 맞았던 것 같다.


드라마 창작도 구성도 배운 적이 없는 내가 작가의 의도를 다 알 수는 없다. 느껴지는 대로 느끼는 것, 그것 말고 무엇을 평할 수 있겠는가. 드라마를 다시 보면서 한두 장면 손석구에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장치들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그러나 몇 편의 에피소드 말고는 이 드라마를 다시 처음부터 보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이 [나의 해방일지]를 볼 때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는 손석구를 볼 때마다, 수능시험을 보았던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알게 된 친구가 떠오른다. 흔한 성과 이름은 아니어서 아마 대한민국에 수백, 수천 명이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지은이와 교회 친구로 먼저 알고 지냈던 이름. 처음 만난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특별한 날이었다는 것을 빼고도 만남이 즐겁고 강렬했어서 아직도 기억나는 이름. 셋이 오래가는 우정이자 인연이 될 것 같은 느낌이 왔던 이름. 크리스마스 이브이거나 연말이 가까워오면 가끔 생각나곤 했던 그 예쁜 이름.


지금 서울에 살고 있을 그 이름, 구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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