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오행](2023)_15NOV22
어쩌다 보니 이사 주기가 대부분 겨울 패턴이 되었다. 계약 기간을 못 채우고 나온 집들도 있었고 계약기간이 12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 한겨울까지였던 경우도 있다. 얼마 전까지 살았던 집도 내년 2월까지가 처음 2년 계약기간이었는데 여차 저차 한 사정과 상황으로 중간에 나오게 되었다.
이 집을 기억하려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나쁜 주인과 좋은 이웃.
그곳은 신도심에서 조금 늦게 지어진 아파트 단지라서 입주한 지 2년 남짓의 새 아파트였다. 동료와 숙소로 공유하던 같은 단지의 다른 동 계약이 곧 만료되는 상황에서 가까운 곳에 월세로 나와 있던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시기가 2020년에서 2021년 사이였으니 부동산이며 집값에 대한 뉴스가 온 미디어를 도배하던 때였다. 특히나 내가 살고 있던 동네는 그곳을 처음 분양받았던 사람들 중에 부동산 관계자들이 많았는지 보러 간 집 중에서 한 두곳은 부동산 관계자가 주인이기도 했다. 지방 소도시로서는 입지가 좋아 대략 만여 세대가 사는 동네에 부동산만 백여 곳이 넘는다.
내가 찾은 그 집은 우연히 들른 부동산에서 마침 월세가 있다며 좋은 조건이라고 정보를 줘서 방문하게 된 곳이었다. 젊은 집주인은 자기 집에서 해 질 녘 노을이 예쁘다며 나를 반겼다. 중개보조인을 통해서 보증금도 조금 양보하겠다고 알려왔다. 사실 보증금은 깎아준 것도 아닌 것이 주변 시세보다 30% 정도 높게 내고는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을 봐가며 조금씩 내리고 조율한 눈치였다. 파격적인 조건은 아니었지만 그 무렵, 지은 지 막 2년 된 그 아파트 단지가 인기가 많아서 월세 찾기가 어려운 때라서(지금 생각하면 겨울이어서 그랬겠지.) 나는 곧바로 계약하고 집이 비기를 기다렸다.
계약서를 쓰던 당일부터 뭔가 찜찜한 상황과 기분을 느꼈지만 한국인에게 ‘기분’이라는 것은 어떤 설명을 불허하는 단어라서 또 금세 약간 들뜬 기분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그날은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였고 월세도 잘 나오지 않던 시기에 나름 좋은 조건에 숙소를 찾았다는 생각에 집주인에게도 부동산 중개인에게도 고맙다는 생각을 했었다. 계약서를 쓰면서 보니 집을 깨끗이 써 달라는 내용과 텔레비전은 벽에 달면 안 된다는 내용과 하자보수에도 신경 써 달라는 내용과 2년 후 절대 재계약은 하지 않는다는 내용 등등.. 보통의 월세 계약에서 다 넣지 않았던 내용들까지 특약으로 메모되어 있었다. 나는 혼자이고 텔레비전도 없고 하자보수 접수는 이미 되어있을 테니 관련 업체에서 방문하고 수리하면 확인만 잘해 주면 될 것이어서 동의하고 계약을 마무리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 집에서 아주 조용히 살았지만 또 조용히 나왔다. 집주인은 아주 욕심이 많은 공립학교 교사였는데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임대인으로 아주 전문가적인 정보들을 갖고 있었다. 당시 이슈가 되었던 소위 임대차 3 법에서 집주인에게 유리한 내용은 모두 파악하고 계약서에 써 놓았으니까 말이다.
이사 후부터 별일 아닌 것으로 연락도 자주한 편이다. 아무리 벌이가 시원찮아도 나는 월세를 밀리지는 않았는데 이번 주인은 계약날짜보다 하루 전에 월세를 넣으라고 했다. 자기가 은행 예금을 넣는데 이체 날짜를 맞춰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통 하루 전쯤에 월세를 이체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는데, 1년 반이 넘는 기간 동안 딱 한번, 조금 바쁜 나머지 전날 월세를 이체하지 못하고 다음날이 된 적이 있다. 아침 9시에 집주인은 “월세가 입금되지 않았으니 오전 중 입금바란다”는 문자를 내게 보냈다. 답장을 하고 바로 이체했다. 기분이 나쁘기도 한 것이 월세를 하루 전까지 입금하라는 그 92년생 주인의 직설도 그렇지만 월세라는 것이 어차피 다음 한달치 선불인 것인데 아침 9시 전에 꼭 내야 하는지…. 십수 년 월세 생활자이지만 이런 주인은 처음이었다. 아주 교양 있게 그러나 아주 야박하게 문자를 보내오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에 붙박이로 설치되어 있던 가전은 흠집 하나까지 확인하는 스타일이었고 내가 이사를 들어온 지 몇 달이 지나서야 자신의 등록 주소지를 이전해 갔으며, 계약날짜 하루 전까지 월세를 이체하라느니, 만일 주말이 끼었으면 금요일까지 넣어야 맞다느니… 귀찮아서 논쟁하기도 싫었다. 하자 접수는 왜 그리 많이 한 것인지 나사 하나 풀린 것까지 업체에서 와서 서비스로 처리했다.
하자 접수된 항목은 많기도 했지만 종종 사람을 귀찮게 했었다. 서비스를 해 주는 업체 직원들은 모두 친절했고 최선을 다해 주인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했었다. 어떤 업체들은 사장님이 직접 수리해 주고 확인해 주고 하시기도 했다. 자신이 지은 집과 자재들에 대해 최선을 다해 사후 서비스를 해 주는 마음들, 그 마음들을 대하면서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방문 문손잡이 돌릴 때 좀 뻑뻑하다고 하자로 접수해서 손잡이를 교체한 것은 애교 수준이었다. 타일은 손톱자국 이상 흠집이 보이는 곳은 모두 교체해 달라고 해서 타일 공사를 대대적으로 하게 됐었다. 큰 벽면 타일을 8개나 갈아야 해서 며칠씩 욕실 두 곳을 번갈아 며칠씩이나 사용못한 기간도 있었다. 집주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보통의 시선에서 말하자면 그 집에 하자는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거의 없는 편이었다.
공립학교 교사 부부라는 주인 내외가 내가 처음 자기네 집을 방문했을 때 집을 보여주며 했던 말, “저희 거실에서 노을이 정말 예쁘게 보여요.”는 사실 반은 뻥이었지만-아파트 오른쪽 건물 틈으로 해지고 난 뒤 여운이 보이기는 했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볼 시간이 없었지만 말이다- 너무 순진해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버린 나는 그 대가를 2년 가까이 치렀다.
알고 보니, 계약을 할 때 너무 까다롭게 굴고 붙박이 장과 몇몇 집안 인테리어를 했다는 이유로 보증금을 높게 내놓아서 월세 계약이 잘 안 이루어졌던 집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중개보조인에게 들을 수 있었다. 집주인이 좀 특이하게 까다로워서 물었더니 부동산에서도 알고 있었다는 답을 한 것이다. 이런. 집주인 부부와 부동산 관계자의 말발에 나 혼자 넘어간 것이 잠깐 짜증 나고 억울했다. 그러나 생각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조용히 넘기고 어서 계약 만료가 도래하기만을 기다렸다. 월세의 5% 내에서만 재계약을 해야 하는데 그게 싫어서 재계약은 안 하겠노라고 말한 주인은, 나에게는 세를 줄 수 없지만 다른 세입자와 신규 계약은 하겠다며 월세가가 고공 행진하던 시기에 월세를 25% 올려서 미리미리 다른 세입자를 찾았다.
몇 개월이 남아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이 집주인과 연락하는 것도 싫어졌다. 마침 집주인이 새로 구한 세입자는 빨리 입주할 수 있는 집을 찾고 있었고 협의 끝에 나는 집을 비워주기로 했다. 내 살림은 그곳으로 이사가 새로 샀던 가전들이라서 내 입장에서는 이사 한번 더 가는 것이 시간과 에너지와 비용 낭비까지 엄청났지만 나는 스트레스로 죽기 전에 그냥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이사가 급했던 새로운 세입자는 내가 보증금을 받기도 전에 짐을 택배로 보내는 중이었고 월세를 많이 올려 받게 된 집주인은 나름 기분이 좋아 마지막에 친절하게 "집을 깨끗하게 사용해줘서 고맙다"는 문자를 남겼지만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청소비까지 제하고 보증금을 넣은 사람은 처음이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단 1원의 손해도 보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너무 미웠다. 너무 젊은 그 집주인을 보면서, 그래서는 안 되는데도, 내가 가졌던 초등학교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존경심은 물론 그의 학생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해 주면서 소심하게 마음을 풀어본다.
그 집에서 그래도 1년 반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나보다 몇 개월 먼저 이사 간 옆집 세입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밤중에 날카롭게 짖어대는 강아지가 있어서 위아래 이웃들과 소란이 있기도 했던 옆집 사람은 어느 날 문 앞에 손소독제를 놓아두었다. 보통 낮에 시간을 많이 비우고 저녁 퇴근이 늦으며, 하필 그 집에 살던 기간에 코로나 백신 접종이 이루어지던 때라 엄마가 코로나 접종을 했던 기간 전후로 집을 많이 비웠었다. 그래서 사실 옆집 사람 얼굴도 몰랐는데 손소독제와 선물을 예쁘게 포장해서 전해 준 작은 성의가 고마웠다.
해가 바뀌고 어느 일요일인가 옆집은 이사를 했다. 나는 짐들이 다 나가고 사다리차가 사라질 때까지 옆집이 이사 가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았었다. 정작 내 옆집사람은 인기척도 없는 옆집 사람이 자신이 놓아둔 선물과 메모만 가져가고 인사도 없다며 서운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주말 오후 종종 내 집 문이 열려있을 때마다 현관 입구에 내가 놓아둔 자신의 선물과 메모를 본 적은 있을 것이라는 심증이 있다.
“ 옆집입니다.
하나 챙겨드리고 싶어
문 앞에 둡니다.”
욕심이 많아 내가 미워한 그 집주인은 내 옆집 사람의 그 따뜻한 메모 하나 때문에 용서받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