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친절한 직원

[계절의 오행](2023)

by 정연진

요즘 은행에 갈 일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은행에서 꼭 오라고 하면 그때 간다. 몇 달 만에 딱 반나절,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아침 일찍 건강검진을 해치우고 나니, 일 년 묵은 건강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면서, 미뤘던 일 하나가 생각나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 그런데 검진항목이 아직 남아있긴 하다), 은행에 다녀왔다.


은행도 정기 인사가 있는 것 같던데 얼마쯤이 주기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방문한 은행의 그 지점에는 2년 넘게 근무하는 직원이 있다. 지난 2년 사이 네 번인가 다섯 번쯤 그 은행에 갔던 것 같고 나는 한 번을 제외하고는 매번 같은 직원에게 '배정'되었다. 2년 반 전, 그 은행에 갔을 때 그 직원에게 내가 원했던 것은 통장 재발행(아마 이 업무가 은행원들이 가장 귀찮아하는 업무 1-2순위에 들 것이다.)이었다. 지갑에 얼마간의 현금이 있길래 입금도 같이 부탁했다. 처음에 그 직원은 나더러, 자기네 지점이 관리지점이 아니라는 둥, 좀 귀찮아하는 티를 내긴 했다. 그때 나는 통장 기본 거래 외에 아직 그 은행 적금도 카드도 없었다. 신분증을 받고 나서 그날 내 일을 처리해 주면서 그 직원은 주택청약저축, 신용카드, 체크카드, 기타 새로 나온 몇 가지 상품 등을 보여주며 마침 이벤트 기간이라며 가입하라고 권유했다. 청약저축도 가입할 참이었고 그 직원이 정말 친절해서 그중 필요한 것 한 두 가지를 새로 가입하고 왔는데, 나중에 보니 휴대폰 앱에 전담직원, 추천 직원 명에 자신의 사번인가를 입력해 두었던 것 같다. 과장급이었던 그녀는 정말 살갑고 친절했다.


청약통장, 예금, 카드 등을 한 번에 만들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이후 은행에 갔을 때부터 또 그다음에 갔을 때에도 그 은행 직원은 이전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녀가 처리해 준 은행 업무는 매번 꼬였다. 단순한 일도 복잡해졌다. 한 번은 외환 업무를 잘못 처리하는 바람에 본사에서 연락해서 확인하고 그 직원도 본사와 내내 통화하고 하면서 꽤 오래 시간이 지체되었다. 나중에 보니 그 직원이 처리 순서를 잘못한 것이라고 하는데, 돈이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다가 하느라 애꿎은 내 통장만 고생했다. 문제는, 그렇게 일처리를 하면서 내게는 사과 한마디 없었고 자신의 직장상사들(은행 뒷자리에 앉은 분들)에게 변명하느라 진땀만 빼더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어서 아무 말 없이 나왔다.


사실 내가 그날 정작 화를 내고 싶었던 이유는 다른 일 때문이었다. 그 직원은 그날 외환업무의 처리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 연락처까지 바꿔서 일처리를 하려 하고 있었다. 내 연락처를 자신의 연락처로 변경해서 바로바로 일을 처리하려 했었는지, 자신이 잘못한 것을 내가 아는 것이 불편했는지 참 복잡하게도 이리저리 방법을 찾고 있었다.(기본적으로 이것은 행정적 사고이고 개념없이 처리할 사안이 아니다. 사고를 치고 몰래 자기 방식으로 처리하려던 그녀를 칸막이 건너편에 앉아서 차분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모니터 앞에서 불안정한 표정으로 야무지게 클릭클릭하는 중에 한두번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연락처가 바뀌었다느니 하는 내용으로 휴대폰 문자 알람이 몇 개 오더니, 마지막에는 다시 내 전화번호로 연락처가 변경되었다. 한참을 본사와 통화하고, 뒷자리의 상사에게 가서 이야기하던 그녀는 마지막에만 '입금되었던 돈을 다시 인출해야 할 것 같다, 본사에서 확인할 것이 있어서 조금 기다리셔야 한다.'는 말만 전달해 주었다. 통화내용을 조금 듣기는 했지만 따져 묻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외환업무였던 점을 감안하여 은행에서 나름 고려해야 할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게 환율이었는지 은행 내부의 다른 절차 때문이었는지는 알려주지 않아서 모른다. 일처리는 며칠이 걸렸다.

며칠 전에 은행에서 가까운 지점으로 한번 방문해 달라는 안내를 해 주었다. 내 영문명이 성과 이름이 바뀌어 입력되어 통장 거래할 때 번거로울 수 있다고 해서 오늘은 영문명을 변경하는 일을 처리하려고 은행에 갔고 그때 그 직원에게 또 배정되었다. 내 앞 순서 사람은 예금이 만기 되어 은행에 왔고 재예치를 하는 일을 보러 온 모양인데, 금액이 꽤 큰 예금이 여러 개 있는 것 같았다. 거의 다 마무리가 되어가는가 싶었는데 그 손님은 마지막에 직원에게 한마디를 던지셨다. "해지하지 말라는 걸 해지하면 어떻게 해요? 이자가 높은 것을 왜 해지해요?" 언성을 조금 높인 그 아저씨도 의사 전달을 잘못했다던지 하는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직원은 그 고객이 말한 것을 다시 확인하지 않고 곧바로 '해 달라는 대로 한 거다.'라고 받아쳤다. 그러나 아저씨의 언성이 조금 높아지자 이내 급친절, 급진정 모드가 되더니 이번에는 '너무 친절하게' 일을 해결해 주는 듯했다. '아, 오늘부터 5.1%가 넘는 이자율이 지급되는 상품이 나왔다, 그것으로 추천해 드리겠다..' 샬라샬라.


내 차례가 되었고 그녀는 흔한 '안녕하세요.'도 하지 않았다.(그 은행에서 안내자로 근무하시는 분은 언제나 직원들보다 친절하시다.) 일하는 은행 직원도 고난도의 업무로 지치기도 하겠지만 요즘 은행이 줄 서서 기다리는 분위기도 아니고 시장처럼 시끄럽지도 않으며 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야 겨우 일을 볼 수 있는 시스템이니, 기다리느라 지치는 것은 사실 손님 쪽이다. 나는 미리 꺼내 들고 있던 신분증과 메모해 둔 종이를 건네며 용건을 말해 주었다. 그 직원은 예의 그 표정 없고 감정 없는 어투로 '영문명 바꿀 거 여기 적어주세요.' 한다. 성과 이름을 확인하고 앞뒤를 한 번 확인해주면 좋을 텐데 다른 지점에서 어떻게 연락해서 온 것인지도 묻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하면 되죠?' 한다, 나도 잘 모르는데, 앞뒤가 바뀌어서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걸 나는 몰랐는데. 가까운 지점에 꼭 한번 내방해 달라고 안내를 해서 온 건데... 바로 앞 순서였던 아저씨처럼 한 번쯤 이야기해 보려다가 그냥 두었다, 말하는 것도 귀찮아서. 내가 50대 거구의 젊은 아저씨였다면 상황은 달랐을지도 모르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길 상황이기도 했지만, 죄송하다는 피상적인 인사받으려고 에너지를 쓰기도 진짜 귀찮아져서 넘겼다. 고객을 응대해야 한다는 시스템이 싫은 건지, 그녀는 내가 먼저 인사하고 일어서기 전까지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스크 위로 무표정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2020년 5월, 맨 처음 그녀를 만났던 날은 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간이었다. 그때 그녀의 인상은 정말 좋았다. 밝고 젊었다. 살가웠다. 그러나 그 후부터 지난 2년 내내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나를 대할 때, 그리고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그랬다. 사람들은 간단한 이체 건으로 은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 다들 나름 바쁜 시간 내어 서류도 다 챙겨 은행으로 향할 것이다. 고객들은 그날 만나는 직원의 일처리 방법과 속도와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를 얻게 되기도 된다. 개인정보를 다루는 업무라는 것이 그래서 그럴 때는'갑'의 위치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 은행 직원이 나름 초봉이 높은 직업군인 것 같던데 쉽게 고객의 정보를 볼 수 있고 관리하고 또 심사자의 위치에 서기도 하는 그 자체로 나름의 '지위'는 획득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너무 딱딱할 필요가 있겠나. 고맙다는 목례까지 고객이 먼저 해야 하는가 싶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친절하셔도 좋겠다.


사실 덜 친절하고 더 친절하고, 불친절하고 그런 잣대는 없다. 그런 걸 따질 필요도 없고. '친절'이란 단어는 그 자체로 자신에 일에, 그때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라는 것이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10여 년 전의 일이던가, 근무평정 평가에서 내 직속상관으로부터 감점을 받았다는 것을 다른 상사에게서 듣고 놀란 적이 있다. 나의 직속 상사가 감점 사유로 메모한 것이 '친절'이라는 그 키워드였다. 민원서비스 담당자로 수년간 같은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한 부하 직원의 점수를 깎으면서 '너무 친절해서'라고 적었던 것이 직원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그 기관에서는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로 남게 되었다. 나를 평가했던 상사가 왜 그렇게 했는지를 알고는 있었지만 기분이 나쁘기보다 웃음이 났었다. 그 평가결과를 본 또 다른 상사는 "서비스 업무를 맡은 사람이 친절한 것이 당연하지. 자기한테 잘 보이라는 말이지 별게 있겠냐. 신경 쓰지 말고 네 갈 길 가라."라고 말해 주었다.


유독 친절하지 않은 그 은행원, 그 은행의 "과장님"을 계속 만나게 되면서 그 은행을 가야 할 때면 그 직원은 피하고 싶어질 정도가 되었다. 은행 자체는 사실 중요한 일을 맡아하는 기관이기도 하므로 사소한 일이라도 일을 처리하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본다. 사람이든, 사람의 일이든 자신의 실수로 인해 피해를 볼 수도 있는 당사자들 앞에서 해명하는 일에 더 급급한 사람은 신뢰가 가지 않아서 싫다. 자신이 덜 책임질 방향으로 해명부터 하는 모습들이 싫다. 그래서 은행 앱 하나 깔고 거래하는 편이 훨씬 더 편하다. 가끔 가는 다른 은행도 있지만 태도로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직원은 없었다. 여러 번 일처리가 불안한 직원은 더욱 없었다. 하필 그 은행, 그 지점의 그 직원, 그 한 사람이 그런 것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내가 처음 그 은행에 갔을 때에는 성과로 올릴 만한 각종 상품의 가입건수를 잡을 수 있어서 그렇게 친절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이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한 사람은 편의점이든, 식당이든, 은행이든, 그리고 그곳의 사장이든, 시급제 직원이든, 누구에게서든 친절하지 않은 대우를 받으면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한 번은 은행 직원의 실수와 불친절함 때문에 그 은행의 모든 계좌를 해지하고 다른 은행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 은행의 지점장이 동료에게 전화해서 사과했던 일이 있었다(나는 이런 일은 그때 처음 듣고 보고 했지만).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동료는 당시 그 은행의 중요 고객 중 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내가 몇 년간 보아온 그 직원은 어쩌면 하나를 잊은 것 같다. 자신이 받는 그 급여,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이 받는 평균 급여보다 초봉이 훨씬 높은 직군인 은행의 과장급이면 으레 받을 것 같은 최소 6천만 원, 혹은 이보다 훨씬 많을 그 급여 안에는 근무시간 내의 '서비스의 질'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사소한 계좌인출 업무든 VIP이자 우량고객의 덩치 큰 예금이든, 가능하면 동등하게 그냥 친절하면 좋겠다. 직급을 떠나 일을 즐기는 인상을 주면 참 좋겠다. 우리가 받는 급여에는 일하는 동안 최선을 다하는 자세, 무형의 서비스가 제공해야 하는 가치, 그것에 대한 몫도 포함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한 번쯤 인지하면서 말이다.


아, 은행도 영리 기관이라고...? 아니, 그보다 더하다. 은행 직원들의 노고가 매일 머리에 열날 정도라는 것쯤은 나도 종종 들어서 안다. 전문직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기능이나 기술, 자격 그것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다. 그것만도 좋다. 그런데 여기에 좋은 서비스 마인드까지 더하면, 더없이 멋져 보인다.


한국에서 가장 큰 은행의 과장급 직원의 내내 무표정한 태도가 아쉬운 것은 그저 단순한 이유이다. 나는 그녀를 만나고 올 때마다 이상하게 뒤끝이 우울하다. 몇 번쯤 생각난다. 말없는 사소한 눈빛에 몸짓에 기분이 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냥 생각해 본다, 친절은, 지금 이 시간, 저 아래 편의점에서 시급제 아르바이트를 하는 비정규직, 비전문직인 18세 청년에게도 강조되는, 그저 마음에 장착해야 하는 룰이자 기본일 뿐인 것을.


그저 자신이 지금 하는 그 일을 즐기는 자세,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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