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오행](2023)_19NOV22
오래 전 미국에서는 예명으로 활동하던 어떤 작가가 자신의 베스트셀러 소설때문에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한 일이 있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종신교수 심사를 앞두고 있던 실력있는 학자였지만 당대에 유명한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임이 밝혀지면서 종신교수가 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난 후 당시 동료교수들이 이 작가의 유명세를 시기하여 의도적으로 교수직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학계에서도 시기심이 이렇게 발동한다는 이야기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참 편리한 '기록의 선택성' 때문에 이후 그는 하버드 교수로서가 아니라 작가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하버드 교수들 중 심리학이나 경영학 분야의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워낙 많아서 이런 일이 없다. 아니, 하버드 교수여서 책을 내는 마케팅이 더 많다고 볼 수 있으니 반대의 경우겠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몇몇 철학자들 중에도 자신들의 이론를 정립하는데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들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학계에서 주목받는 철학, 심리학 전공 대학원생들 중에서도 유명 대학 교수 대신 철학자, 심리학자로 남은 사람들도 있다.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아카데미아에 남고 싶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남긴 저작들이 철학이나 미학같은 대학 전공 교과목의 교재로 쓰이기도 하는 점은 흥미롭다.
흥미롭게도 학계에 이런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많은데, 이런 이야기들을 보고 있노라면 시기심은 인간을 가장 치졸하게 만들 수 있는 양심의 비늘 같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 날의 승자와 패자를 가르려는 아이들의 놀이에서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대학의 교수직을 심사하는 위치에서도 분별심이 그렇게 그릇되게 작용한다는 것, 결국 그 무엇도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우리가 지극히 객관적인 평가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아주 상대적인 평가의 결과라는 이야기여서 아이러니하다, 인간 세상의 기막힌 아이러니.
나의 이야기이건 내 주변의 이야기이건,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가 과장되었건 아니건 간에, 인간의 시기심이 정치적으로 작동해 버리게 되면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불변의 진실을 유지하는 데필요한 시간, 사건, 공간, 그리고 사람이라는 조건이 어느 순간 변해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물리학의 도움으로 시간과 공간을 어느 정도 고정시키고, 사건의 핵심을 기록해 두었다 하더라도, 여기에 인간이 개입하면 모든 기록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겠다. 나머지 세 가지 조건들이 진실임을 기록하고 유지하는 주체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억이 안 난다.' 또는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등과 같은 말바꾸기 하나로 기록은 바뀔 수 있다. 컴퓨팅 작업 역시 결국 고정된 실체는 아닌 셈이다. 인간의 손, 그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실체를 정의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도 말과 행동 그 어느 쪽도 확실히 믿을 수가 없으니, 그러면 진실은 다시 그 어디에도 없는 셈. 심리적 진실이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가장 편리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역사적 진실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정치적인 컨센서스를 구축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성역이 되어 아무나 접근할 수 없다. '우리가 남이가'의 학연, 혈연, 지연은 어쩌면 인간의 마음에 시기심과 분별심이 공존하면서도 공정하게 작동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만들어져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와 믿음, 시간과 공간이라는 배경이 아주 절대적이라고 믿어버리기에는 세상의 기준, 아니 인간이 판단하는 모든 일의 기준은 모호하다. 평가자인 인간의 분별심이 지나치게 개인주의에 기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전혀 다른 분야의 이야기임에도 우리는, 드라마 속 어떤 인물들이 시기와 질투에 눈 멀어, 분별을 잊어버리는 장면들을 보고 어떤 심리인지를 알아챈다.
예를 들어,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교수인 이수경이 제자의 실기 점수를 이유도 없이 형편없이 준다거나 개인적인 시기심으로 선배 교수의 제자를 점수라는 위력으로 누르려는 장면, 박준영의 지도교수인 유태준이 제자의 피아노 연주 녹음본이 자신의 이름으로 인터넷상에 공개되어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아버리는 상황들을 보고 그 이유를 한눈에 아는 것들 말이다.
시간이 흘러도 그 때 그 사건의 순수함과 관계의 진실함을 그대로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 시절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순수하게 창작의 열정으로 예명으로 소설을 냈던 그런 일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역사들이 후대에 와서 기록자체를 바꾸는 악의적인 편집으로는 진화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의 기억력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의 식으로 정치적으로 흘러가버리면 믿을 만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기억의 양가성'에 무게를 더 두고 또 그런 논리를 좋아하기도 하겠지. 기억이 본래 양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뇌가 선택적으로 상황에 따라 작동해 버리기에 결국 양가성을 갖게 되는 것일 거다. 그저, 미래의 독자들과 시민들을 위하여 열린 해석의 가능성과 기회만 늘 남겨 두었으면 좋겠다.
어제 잠들기 전이었을까 아니면 아침에 일어난 직후였을까, 나는 아주 단순한 본능적인 인간 심리들- 시기심과 분별심에 대해 생각했다. 남이 잘 되는 것, 내 기준보다 더 빨리 성취하는 것, 나보다 더 인정받는 것에 대한 시기심을 밖으로 드러내어 폭발시키지 말고 그 에너지를 오히려 자신을 더 성장시키는 분별심으로 훈련시키는 작업을 하면 안 될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들의 앞길을 방해했던 선배들, 학자들, 그리고 몇몇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니, 이런 시기들은 일종의 질투이기도 하다. 남이 가진 것을 뺏고 싶어하는 삼각관계의 질투심은 차라리 귀엽기까지 하다.
언젠가 '너의 이번 생은 실패'라고 나를 향해 말했던 친구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어쩌면 이번 생이 실패했기에 너와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찌르는 그 말 자체가 이미 너와 내가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지만, 너는 그것조차 알지 못했더라. 중요한 것은 이거란다.
나는 내 인생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너에게서 평가받을 이유가 없고 우리는 이미 출발선이 달라서 결코 만날 수도 없는 목표를 향해 가고 있으며 그래서 더더욱 서로가 서로를 평가할 수 없다는 것, 나는 항상 나름의 레이스를 최선을 다해 걷거나 뛰고 있었다는 것. 비교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내가 너에게 말로 해야 하나 싶었다.
내 삶이 너의 입장에서는 너무 느리게 보였거나 네 기준에서 언제나 '실패'의 영역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단지, 어제의 나보다 한 줄 책을 더 읽을 수 있고 성숙하고 분별있는 시각으로 책과 세상을 읽고 볼 줄 아는 어른이고 싶었다. 어제의 나에게서 '조금 더 나아졌다'고 평가받고 싶을 뿐이란다.
아, 물론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과거의 이상향들을 이루지 못했지,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 그런 점에서는 실패가 맞다. 외교관이 되지 못했고 외교부장관은 더더욱 안 되겠지, 나는 지금 우주물리학자도, 대학의 정교수도 아니지.
지구상에 인간이 80억이 넘어간다는데 모두가 다 외교관이나 과학자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네가 원하는 것이 나의 성공이었는지 성공한 나였는지 모르겠지만 너도 나를 진심으로 응원했었기를 희망한다, 내가 너를 항상 응원했듯이.
꽤 괜찮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어서 아쉽지만, 그래도 '너는 실패했다'는 너의 단언은 좀 슬펐다. 너의 그 말은 마치, 네가 시기할 만한 어떤 경쟁적 부분이 나에게 더 이상 없다는 투로 들렸다. 나는 너와 나의 인생을 경쟁의 레이스로 본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나의 불찰.
네가 실패라는 말 대신 '너는 실력이 부족했다' 정도로 보다 더 현실적으로 말해주기를 나는 바란 것 같다. 정치적 심리전보다 '실력이 부족해서'라는 그 사실 하나가 오히려 분별 있고 공정하며, 개운하고 뒤끝이 없게 느껴지는 것 같다. 세상 어디에도 공정한 채점이란 없으니까.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세상이공정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지나친 시기심도, 분별없는 평가들도 가능한 공정할 수 있도록 조율할 수 있지 않을까.”
시기심, 남보다 많이 갖고도 무턱대고 생기는 그런 마음을 어쩌겠는가. 시기심, 질투심 같은 '기분'이나 '마음'들은 알고 보면 명확한 잣대나 기준이 없어서 문제인 것 같다. 너보다 못한 것이 열 가지도 넘는 친구에게서도 나와 다른 단 한 가지 나은 것이 미워서 우리는 시기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내가 가진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 가까운 관계에서 질투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갖지 못한 그 한 가지를, 내가 도달하지 못한 그 하나의 꿈을 상대방도 갖지 못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 철없는 마음. 가족이건 이웃이건, 동료들이건... 그리고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유명인의 이야기이건 우리는 남의 성과를 나의 목표치와 비교해 버린다.
그럴 필요 없지 않은가, 최선을 다한 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상대를 이긴 셈인 것을. 몇 번쯤 경험해 보면 다 알게 되겠지, 나이를 먹는다고 모든 종류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누적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멋진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시기심을 어제의 자신보다 나아지려는 기준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불필요한 뱃살 같은 시기심을 줄여가고 근육이 되는 분별심을 조금씩 키워가면 좋겠다. 어제보다 나은 눈으로 나와 타인, 그리고 좋은 것을 분별할 줄 아는 눈을 키워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불가능한 최고의 자리를 꿈꾸며 자신과 이웃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대신, 어제의 나 자신을 오늘의 내가 더 응원해가면서 살자고, 그냥 그렇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