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오행](2023)_격려의 힘 5(9월이 생일인 친구)
한 때는, 늘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이 즐거운 일상이었던 때는, 20대였을 때는, 앞으로의 삶에 대해 걱정을 모르고 살았던 때는... 11월 이맘 때 다음해의 새 달력을 받으면 가족이며 친구들 생일부터 찾아 기록했던 것 같다. 친한 친구들의 생일은 아주 중요한 연례행사들이었고 생일파티가 있는 날은 모든 일들을 제치고 그 '회식'에 참여했던 날들. 돌아보면, 주말을 포함해서 일주일 내내 친구들을 달고 살지 않았었나 싶다, 모두들 제각각 취직을 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대학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9월이 생일인 친구들 중에서, 새 달력을 받는 11월이 되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생일이 9월인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우리가 부천에서 수년 만에 재회한 후, 한동안 자주 만나고 연락하고 지낸 20대 후반쯤이었을 것이다. 친구와 고등학교 동창이었는데도 그 때는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다. 그 친구는 문과반, 나는 이과반이라는 멀고 먼 복도끝의 경계선에서 2년 여를 보냈고 당시로서는 친하게 지낼 만한 공통점이 우리에게는 없을 뻔했지만, 신기하게도 우리는 아침마다 통학버스를 같이 탔고, 나와 친했던 한 친구가 또 그 친구와 친했다는, 그렇게 흔한 관계로 이어져 있었다.
여차저차한 생활의 이야기들을 건너뛰고 우리는 20대 중반쯤 우연히 재회하게 되었다. 고향도 아니고 졸업했던 학교가 있던 도시도 아니고, 생뚱맞은 서울 주변의 도시에서. 그 이후 간간히 연락하고 끊기고 또 연락되고 하면서 인연을 잇고 있다. 학창시절에 붙어다닌 기억은 없었지만, 조금 성숙한 후에 만나 어느 새 우리는 누가 물어도 '친구'라고 단언하는 관계가 되었다. 친구는 나보다 사회생활도 빨리, 결혼도 아주 빨리 해 버린, 모든 것을 먼저 경험한 인생 선배 같은 느낌이어서 늘상 나를 챙겨주는 모양이 되었는데 사회생활도 해 보고 결혼을 해야 어른으로 인정받는 것은 친구와 나를 보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 것 같다.
바람앞의 촛불처럼 불안불안한 무직자 생활 중인 때에도 친구는 위로가 되어 주었다. 사는 곳과 가는 길, 그리고 사는 방식이 너무 차이가 있어서 어느 때에는 이야기의 간극을 메우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또 그럴 때는 그녀의 멋진 남편이 나의 편이 되어 우정에 금가지 않도록 중재해 주기도 했다. 힘들 때 가장 먼저 달려왔고, 몸을 사리지 않고 내 일에 앞장서 준 친구 하나. 기숙사에서 나와 학교 앞으로 이사를 했을 때 커다란 매트리스를 선물로 보내줄 줄 아는, 이런 우정 하나 가진 것은 정말 뿌듯하고 마음 든든한 일이다.
일년에 두어번이나 얼굴을 볼 수 있었나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와의 모든 한 번, 한 번의 만남이 내 기억 속에는 잊을 수 없는 감동과 이야기로 남아 있다. 일주일에 세번씩이나 기차로 버스로 서울로 오갔지만 서로 만날 짬이 없었는데 그녀는 한밤중에 터미널로 나와 버스를 같이 기다려주었다. 서울에서 하룻밤 호텔에 묵는 일정들이 있을 때 남편을 운전자로 대동하고 호텔방으로 쳐들어왔다. 그 친구가 있을 때 서울과 부천의 밤들은 아늑했다. 공항에서, 기차역에서, 터미널에서, 우리는 그런 장소에서 만나고 또 헤어졌던 것 같다. 친구는 정말 바쁜 자신의 일상 속에서도 한밤중에, 새벽에 달려와 주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친구의 이런 이벤트들은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우리들만의 추억으로 하나 하나 쌓여왔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녀가 나에게 내어 준 시간과 노력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서울의 한밤을 처음 달려 본 것도 그 친구와 함께였다.
똑같은 나이인데도 친구는 어떻게 그렇게 야무지게 세속적인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녀와 나 사이의 그 간극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과 일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와는 다른 세상 사람같다. 나의 단순한 생활 패턴과 그녀의 바쁜 일상은 누가 보면 전혀 공통점이 없다. 문학도였고 예술가의 기질이 다분했던 친구에 비해 나는 수학도 못 하면서 그냥저냥 이과계열로 진학해 공대에 가 버린,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인문학도가 된, 방황하는 청춘일 뿐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그 시점에는 나의 '철없는 방황'과 '너무 일찍 철들어 버린' 그녀의 외로움이 공존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시기에 부천에서 만났고.
나에게 대한민국 부천은 언제나 중동, 그 때 그 자리, 그 때 친구의 직장이 있던 사무실이 중심이다. 친구가 살던 빌라, 함께 이동했던 길, 그리고 서울로 출장가는 날 따라 나섰던 미국 대사관 주변의 그 곳들. 나는 아직도 그 주변을 지나게 되면 바쁘게 뛰어다니며(!) 일하던 그 시절 친구의 모습을 떠올린다. 작은 회사의 대표인 너와 함께 함께한 시간들, 그 때 내가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더 야무지게 너에게 도움을 주었을 텐데. 그때는 왜 그렇게 무지했을까.
예술가의 길을 가고 싶었다는 친구, 그녀는 지금 차근차근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나의 길을 응원해 주었던 친구의 그 오래 묵은 격려에 나는 답도 못해 준 것 같다. 해결하지 못한 그때 그때의 생활의 문제들 앞에서 친구는 항상 내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었다. 아마 그 때 친구는 늘 '둘'이었고 나는 '혼자'여서 그래서 어느 정도 용인되었던 거겠지? 일방적인 나의 잠적에도 늘 기다려준 친구, 언제 연락해도 반가워했던 친구, 친구의 생일이 있는 9월이면 나는 최소한 열번쯤은 생각을 했지만 생각 날 때마다 연락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늘을 보니 곧 첫눈이 오려나보다.
"시리야, 이런 날이면 나는 그 때 서울의 늦은 밤을 신나게 달렸던 날이 생각난다. 그래서 나는 너의 음력 생일이 있는 9월에도, 양력 생일이 있는 10월에도, 밤바람이 차가운 11월에도 너를 생각한다. 인간에게서 종종 멀어져 버리는 이 연약한 존재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기를. 곧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귀청 떨어지게 격렬한 너의 목소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