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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진 Oct 01. 2023

어떤 중독 1

01OCT23

   

  살면서 어떤 것들에 중독되는 때가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테고, 고백하건데, 나는 종종 그랬던 적이 있다. 그것은 술이나 담배같이 폼나는 부류가 아니라 책이나 드라마같은 시시한 것들이라 문제다. 나는 별 취미도 없으므로 내 인생은 꽤 단순하고 재미없긴 하다.


  내가 20년가까이(!) 중독되어 온 것 중 하나는 드라마 CSI 시리즈였다. 이미 이십 여 년 전에 시작된 이 오래된 드라마를 나는 최근에 다시 집중해서 보고 있다. 하루 한 두시간, 한 두 편을 찾아 휴식 삼아 보는 정도를 넘어섰기에 이것은 중독 증상이 분명할 것이다.


  벌써 몇 주 째, 쉬는 날이면 아침부터 밤까지 온종일 CSI 시리즈를 보고 또 본다. CSI를 보기 위해 다른 잡다한 일들은 모두 제쳐 두고 사회적 관계에서도 잠적한다. 이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더 심각한 수준으로 폐인이 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중독은 독이 아니라 약이 되기도 한다고 위안을 삼는다. 아, 물론 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이 드라마 때문에 나는 오히려 폐인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지.


  CSI 시리즈가 처음 방영된 것이 벌써 20여년 전이라니! 손으로 꼽아보고 나서 나는 꽤 놀랐다.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하면, 오씨엔(OCN)이나 슈퍼 액션(Super Action) 같은 케이블 채널에서 생방으로 보기 위해 시간을 맞춰 기다렸던 시절도 있었다.


  최근 20여년 치 방송분을 한 자리에 앉아 다시 보니 그 때는 몰랐던 몇 가지 사실들이 발견되어 꽤 흥미롭다. 매주 한 편  한 편의 에피소드를 기다리는 재미도 좋지만, <드라마 몰아보기>도 꽤 괜찮은 선택인 것 같다. <오징어 게임>이나 <더 글로리> 같은 경우는 방송이 모두 끝난 후 몰아보기 만으로도 충분하고,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곤충학자인 길 그리썸 반장이 등장하는 라스 베가스(CSI: Las Vegas)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즌이다. 방송 초반에는 방송 시간을 지켜 찾아보고 했던 기억이 있다. 한창 크느라 정신이 없었던 10대에서 20대 초반에는 친구들과 노느라, 대학에 다니느라, 주중 저녁이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꽤 많은 에피소드들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그동안 간간히, 재방송 일정이 잡히면 맘먹고 보고는 했다.


  하지만 20대에 나는 거의 TV가 없는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그나마  방송으로 볼 수 있는 기회도 엄마가 있는 집에 갔을 때로 국한되었다. 그리고 엄마의 TV 리모컨을 사수할 수 있는 시간은 <일일 드라마>가 끝나고 엄마가 잠드신 이후여야 해서 보통은 밤9시가 넘어 방송하는 편만 시청이 가능했다.


  이렇게 나름 인고의 시간을 거쳐 CSI 방송을 사수한 나같은 골수팬이 있다는 사실을 저 유명한 제작자인 <제리 브룩하이머>는 알고 있을까.


  어릴 때는 몰랐던 CSI의 마력. 이제야 보이는 이 드라마의 위대함… 내가 CSI, 유독 라스 베가스 시즌들을 좋아하는 것은 내가 이 드라마 속의 과학 실험 장면들을 좋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FBI요원이 되는 것이 한때의 꿈이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CSI에서 보여주는 실험실 장면들은 실제 실험처럼 잘 그려낸 편이다. 인기많은 의학 드라마, 특히 한국의 의학 드라마나 범죄 수사 드라마가 등장인물들의 관계나 배우들의 인기도에 치중한 반면, CSI는 범죄해결 자체에 초점을 둔다. 모든 실험 기구, 도구, 부검 장면 하나하나가 범죄의 재구성을 위해 정성을 다한 흔적이 역력하다.


  언젠가 이 드라마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실제와 같은 연출을 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열정과 에너지로 한 편 한 편을 제작한다는 것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나누는 수사관들의 대화나 농담 하나하나도 허투른 것이 없다. 얼핏, 이 드라마가 꽤 비인간적이고 불친절한 다큐멘터리 같아 보이지만 CSI는 내가 아는 어떤 드라마보다 유용하고 친절하며 인간적이다. 꽤 좋은 성장 드라마의 예시이기도 하다. 그것도 어른들을 위한 굉장한 성장 드라마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가령, 곤충의 생태를 관찰하며 곤충들과 같이 밥을 먹던 그리썸 반장이 어떻게 자신의 팀원들과 소통해 가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지, 그리고 결국에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성장해 버린 새라를 돕고, 그녀와 연인이 되는지를 우리는 관찰하게 된다. 부유한 집안의 딸이자 댄서였던 캐서린이 딸 린지의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힘들어 하면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쌓고 결국 팀의 리더가 되는 과정도 그려진다.


   어려운 환경에서 과학자로 성장한 워릭(워릭 브라운)이 그리썸의 조언으로 전문가가 되어 가는 과정도 담겨있다. 천재이면서 괴짜인 그렉은 한꺼번에 밀려드는 유전자 분석과 같은 일들을 척척 해 내는 일당백의 일꾼이다. 기회만 되면 직장 동료와 어떻게 해 보려는 가벼운 면이 있지만, 아이돌같은 초반의 이미지와 그리썸 앞에 서면 긴장하며 쩔쩔매던 모습을 점점 극복해 내고 그는 결국 현장 요원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단 한 편의 에피소드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꽤 긴 시간에 걸쳐 천천히 완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기획자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 드라마를 제작해 왔다는 것은 대단한 계획이자 인내라서 그 또한 멋지다. 그동안 그리썸 반장 팀의 핵심 요원들은 바뀌지 않았으므로, 어쩌면 배우들 스스로도 20여 년 전의 자신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CSI를 통해 자신들도 함께 성장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배우들의 커리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CSI이니 실제로도 그렇고.  


  내가 CSI 폐인이 된 것은 내가 범죄 드라마를 좋아하기 때문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 내가 본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 '과학적'이다.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 과정을 수사관들이 직접 발로 뛰고 추론하고 실험해 가며 증거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증거들을 유전자 분석이나 추출, 크로마토그래피, 원심분리하는 장면은 실제와 거의 흡사하다.


  몇 개의 시리즈를 흥미롭게 보던 시절에는 나도 학부생으로 화학 실험실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특히 그렉이 사용하는 실험 기기들이 꽤 익숙했다. 어쩌면 나는 그 시절 CSI를 보면서 실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아 흥미를 더욱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아, 2007년에, 뉴욕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아래로 몇 시간을 더 가야하는 곳으로 교환학생을 떠났던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던 길에 라스 베가스를 방문했던 것은 정말 우습게도, CSI 시리즈를 촬영한 곳이었다는 이유때문이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지역이기에 동부의 뉴욕 주변을 중심으로 여행하고 싶어했던 룸메이트와 달리, 나는 서부 여행을 선호했다. 나는 지금도 라스 베가스를 떠올리면, CSI홍보 배너와 셀린 디온(Celine Dion)의 연말 공연 배너가 곳곳에 크게 걸려 있던 공항의 대합실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어느 때보다 길다는 2023년의 추석 연휴에 나는 두어 가지 이유와 핑계로 CSI에 파묻혀 있다. 오른쪽 발을 다쳐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특별히 여행이나 다른 일정을 만들어두지 않은 그럴 듯한 두어 가지 이유로.

  일명 <몰아보기>로 시청하면서 보니 그동안 내가 놓쳤던 에피소드가 꽤 많다. 요원들을 따라 범인을 찾는 과정에 집중하느라 그동안 보지 못했던 수사관들 간의 다양한 긴장과 이완의 관계들도, 그리썸을 통해 장면 장면에 삽입된 많은 문학적 상징들도 이제야 그 프레임 전체가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헨리 제임스, 윌리엄 포크너, 올리버 헉슬리, 종종 등장하는 소로우의 명언들, 그리고 붓다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철학의 꽤 많은 고전과 작가의 이야기들도 여기 다 있다. 길 그리썸을 탄생시킨 제작자의 사고의 지평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이 드라마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이전에 보아 넘겼던 장면들이 지금은 전혀 달라 보이고, 몰랐던 대화와 대사와 상징들이 곳곳에 보인다. 영화 <매트릭스> 못지 않게 많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메타포가 여기 담겨있었다.


   나는 다시 길 그리썸을 사랑하게 되었다. CSI가 한낱 소설이자 허구의 이야기이자, 그저 창작된 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중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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