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OCT23
내가 소로우를 알게 된 것은 로버트 프로스트를 알고나서도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평균적으로 [월든]을 접했을 법한 나이에서 그리 빠르지도 않았다. 친구가 어느 날, [월든: 숲 속의 생활]을 선물해 준 일은 이후 '모든 것이 달라진' 계기가 된다.
나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소로우의 [월든], 그리고 저명한 학자이자 번역가인 김욱동 선생님을 어느 시점에 차례로 만나게 되면서 영문학도의 길을 걷게 된다. 출발이 늦었고, 문학가나 학자들이 흔히들 생각하는 승리의 결승점에도 도달해 보지 못했으니, 이 길에 안착했다고는 할 수 없겠다. 하지만 위의 세 가지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 삶의 방향을 바꾸는 획이 된 것은 분명하다.
지난 2월 어느 모임에서 한 동료(한OO)는 자신이 [월든]을 읽었던 것이 고등학생때였노라고 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심리학자인 그녀가 이미 소로우를 알고 읽었을 때, 나는 그런 고전은 물론 한국 소설도 한 권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무지한 탓에, 별 생각도 없이 이과계열을 선택하고 교과목의 대부분이 수학, 과학으로 가득한 학교 시간표를 소화하고 있을 때 그녀는 이미 나의 연인(!), 소로우를 만났던 것이다.
내가 [월든]을 읽은 것은 그러니까, 내가 공대생이었을 때였고 원어로 [월든]을 접한 것은 영문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내가 문학이나 어학에 특출난 소질이 있어서 공학도에서 영문학도로 방향을 급회전한 것은 아니다. 그저 마침 그 시기, 몇 가지의 시도와 두어개의 우연이 겹쳐 결과적으로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었다고 해 두자.
어떤 운명의 메커니즘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0대의 어느 날 이후, 나는 늘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암기하고 다녔다. 어느 곳이든 여백이 생기면 [가지 않은 길]의 저 유명한 마지막 네 줄을 적어 두곤 했다. 심지어, 대학원 시절, 언어교육원에서 토익 강의를 하던 때에도,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자료의 빈 공간에 으레 그 구절을 적어두곤 했을 정도이니 참 지독한 집착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프로스트를 사랑했지만 결국 프로스트에 대한 연구는 시도해 보지 못했고, 그에 대한 사랑은 언젠가 대학원 수업의 학기말 페이퍼를 써 낸 정도에서 마침내 끝이 났다.
친구에게서 [월든]을 선물받고, 여러 번역가의 번역본으로 읽고 또 읽으며 소로우를 '사랑'하게 된 이후, 나는 거의 프로스트를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언젠가 '대학원에 와서 공부한 번 해 보라'고 권유하셨던 강 선생님이 내가 프로스트를 좋아하니 그에 대해 공부해도 좋다고 말씀하신 적은 있다.
그때 나는 이미 소로우를 더 좋아하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프로스트에서 멀어졌는데 그렇다고 소로우를 전공한 것은 또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로우는 분명 미국문학가이지만, 소로우를 전공하는 문학 전공자는 실제로는 (거의) 없다. 한국의 영문과 대학원에서 [월든]을 교재로 하는 수업도 없어서 나도 석사과정 때였던가, 소로우의 통나무집이 표지에 그려진 한정판 하드커버가 멋져 보여 소장용으로 구입하면서 드디어 [월든]을 원문으로 읽게 된 것일 뿐이다.
내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드라마 시리즈인 [CSI: 범죄수사대]의 길 그리썸 반장을 좋아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틈틈히 읽던 책, [월든] 때문이기도 하다. 종종 그가 자신의 팀원들에게 소로우를 인용하며 특유의 지적인 매력을 발휘할 때, 그리고 팀원들이 그의 그런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월든 호수의 모기(!)에 대한 강연을 하고,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유유자적한 장면에서도, 나는 한없이 그리썸이 멋져 보였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월든을 향한 꿈은 최근 CSI 재방송을 보면서 스멀스멀, 로망이 되어 심장을 뛰게 한다. 언제나 나의 동경의 장소였고,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나의 이타카(Ithaca), 월든 호수여.
시간적인 이유와 경제적인 이유로 당장은 콩코드를 향해 내달리지는 못하겠지만, 살면서 하나쯤은, 꼭 하나쯤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서라도 성취되면 좋지 않을까. 그곳이 나에게는 '월든 호수'였으면 좋겠다. 그것 외에 별다른 꿈을 꿀 여력이나 핑계가 없기도 하다. 황금같은 연휴에, CSI를 보면서, 포기해 버린 월든을 향한 꿈을 한껏 꾸고 있는 나는, 여전히 철없는 연구자이다.
[월든]과 [CSI] 사이, 문학과 과학 사이에 사실 경계나 구분은 없다. 다만, 내가 걸어온 공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점 위에는 어느 날 나에게 [월든]을 선물해 준 친구와, 우연히 문구점에서 발견한 노트에 적혀 있던 프로스트의 시와, 좋은 영문학 도서들을 추천해 주신 김욱동 선생님과, 그 지리하고 긴 시간동안 내가 흥미를 잃지 않도록 해 준 길 그리썸 반장이 있다.
나는 이제 내가 사랑한 영문학과 이별할 예정이지만 그렇다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이들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