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시작되면서 몇 주간 바빴다. 야심차게 매일 쓰겠다고 마음 먹은 일기는 하루, 이틀쯤 밀렸나 생각했더니 어느 순간 2주이상을 빠졌다. 으레 그렇겠지만 일해야 하는 시간이나 규칙적으로 할 일이 생겨버리고 나면 글을 쓰는 시간, 일기를 쓰는 시간과 같은 자기와의 약속들은 지키기 힘든 선택적인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매일 매일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습관으로 만든 사람들의 저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되는 것이겠지.
규칙적으로 일기를 쓰는 일에도 이미 실패했지만 나는 매년 세우는 올해의 목표들을 제대로 실천해 본적이 없었다. 겨우 해 내곤 하는 일들도 아주 소수에 불과하거나 거창했던 계획표에 비하면 아주 초라한 수준이었다.
피아노를 배우려던 시도도 그랬다.
첫 직장에서 어느 적도 적응이 되어 가고 맡은 일이 쳇바퀴돌듯 매일의 반복적인 루틴으로 고착되어갈 무렵, 나는 매너리즘에 빠졌다. 어쩌면 그것이 천성인지는 모르지만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을 잘 할것만 같은 성향인 내게 어느 정도는 자유를 갈망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것을 그때쯤 알았을 것이다. 매일매일 다른 화제와 주제를 찾아 일해야 하는 곳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뭔가 새로운 흥미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얼마 후 나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었다. "상담은 예약"이라는 문구가 문 앞에 붙어있었지만 나는 어느 날 퇴근길에 무작정 그 학원을 방문해 등록부터 하고 상담을 했다. 그리고 그 날, 바이엘 한 권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한 달쯤 꾸준히 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퇴근 이후에 학원에 가는 나를 기다려야 했던 피아노 원장이 주 2회로 레슨을 바꾸고, 나중에는 집이 멀다는 등의 이유로 또 조금씩 시간을 들쑥날쑥으로 바꾸면서 나도 흥미를 잃게 되었다. 게다가 바이엘이 끝나고 손가락을 풀어주는 연습용이라며 하농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이 너무 재미 없었다.
다행인지 직장에서는 연말이 다가오고 행사준비 등으로 야간에 일을 해야하는 상황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피아노 학원엘 가지 않았다. 스물 여섯이었던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았던 피아노 원장은 얼마후 급하게 학원을 넘겨 버리고 멀리 이사를 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사실 내가 그 곳에 다닌 짧은 기간 동안 그 원장은 여러차례 소개팅을 하긴 했었고, 레슨 시간의 반 정도는 티타임에 쏟으며 내 사생활에 대해 묻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때웠었다. 그 생각을 하면 시간이 아깝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것이 이십대에 도전했던 피아노 배우기에 흥미를 빨리 잃고 만 계기로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것이다.
스물 여섯에 바이엘을 배웠던 나의 시도는, 그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흐지부지하고 말았던 그간의 나의 목표들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채 몇 달도 배우지 못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 정도도 버텨내지 못했나 이해가 가질 않기도 한다. 나의 야심찬 시도는 그 때, 결혼과 연애 등에 관심이 많았던 또래의 피아노 원장과의 만남으로 시험대에 올랐던 것 같다. 그 핑계로 어려운 고개를 넘기지 못한 채, 늘 미완성으로만 남아 미련을 남기고 말았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피아노를 다시 배우지는 않았다. 바이엘에서 멈춰 있는 나의 피아노 실력은 브라이언 크레인과 같은 음악들을 듣는 것으로 대체되어 왔다. 언제든 다시 해야겠다는 마음, 좋아하는 곡들은 직접 연주해 보고 싶다는 오랜 꿈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지만 실천은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에 건반을 배우는 아이들이 가장 많이 싫증을 느낀다는 체르니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서 있다. 아이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아니 여덟살 아이보다 못한 나의 인내력과 끈기.
꼭 그때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내내 쉬던 지난 몇 달 하루에 낮은음자리표 음계 하나씩만 외웠어도 악보 여러개는 벌써 다 외우고 칠수 있겠다 싶다. 일이 아무리 바빠도 잠깐 일기를 쓸 시간은 분명 있었다.
바쁜 일정이 조금 지나면 올해에는 꼭 다시 시작하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오늘 오전에 가 볼 요량으로 봐 둔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작은 과외식 학원이고, 이번에는 아이들이 많이 오는 시간에 적당히 끼어서 바이엘부터 다시 시도해 볼 마음으로 미리 연락을 해 두었다. 그리고 연휴와 개인 사정으로 시간을 조금 조절해 오늘 오전에 들르기로 했었는데... 늦잠을 자는 통에 제 시간에 가지도 못했다.
계속되어야 하는 일, 하루하루의 연습이 쌓여야 멋진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일은, 그것이 혹여 아주 작은 한 단계라 하더라도 귀한 시도이다. 꾸준함은 인생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것만 같다.
꾸준하게 어떤 일을 해 낸 사람들은 누구나 다 멋지다. 연습과 훈련으로 습관을 만드는 많은 사람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여덟살 어린아이가 피아노 곡을 암기해 내는 일도 살펴보면 참 대단한 일이다.
어른이 되어도 해 내지 못한 일이 많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