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기록한다, 모든 상처들을

[계절의 오행](2023)_격리시절2

by 정연진

손가락 봉합을 한 지 석 달 째가 되어가는데도 오른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내가 운이 좋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일기 쓰는 일 뿐 아니라 겨우 겨우 준비해 온 이번 학기 수업도 실패일 것만 같다.


3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다음 날 있을 강의 준비를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노트북과 마이크 등 몇가지 도구를 챙기려던 내 눈에 그동안 미뤄뒀던 작업 하나가 “하필” 눈에 띄고 “말았다”. 몇 달 째 너저분하게 엮여 방치되어 있던 전기선들...

‘저 녀석들을 해결하고 수업 준비를 해야겠군.’


집중해야 할 환경을 방해하고 노트북 앞뒤를 가로 막고 있는 전기선들을 정리해 버리고, 두어시간 집중해 내일 강의 준비를 하자고 마음 먹었다. 묵혀둔 잔업하나를 해결하려니 갑자기 뿌듯하고 즐거웠다. 날씨도 좋았다.


대충 묶어둔 플라스틱 선을 자르기 위해 커터칼을 힘있게 내려 그은 순간, 눈앞에 불꽃처럼 뭔가가 튀어 올랐다.

분수처럼 퍼지는 핏줄기...

순식간에 바닥에 흥건한 피.

아!

나는, 선을 잡고 있던 내 손가락을 꽤 자르고야 말았다.


응급실에서 봉합 수술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코로나검사 결과까지 늦어져 대기시간이 길어진 통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내 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수업은 직강으로 해야 했으며 봉합한 실을 푸는 2-3주간은 타이핑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번 학기는 하필 수강인원에 따라 수업방식이 정해져있어서 대면 강의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화상수업을 하더라도 당분간 메시지나 질문에 답할 수도 없다. 아니, 그것보다 당장 머리도 못 감고 몇 주를 보내야 했다.


사고는 순간이었는데 응급실에서의 몇 시간 동안 온갖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왔다갔다 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것을 곱씹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나는 요즘 왜 되는 일이 없을까.” 신세 한탄으로 끝이 났다. 생각이 사차원으로 흐르면 답이 없다. 신은 있는가, 없는가처럼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질문과 답만 멍한 눈으로 반복한 것 같다.


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은 이런 것이다. 외과에서는 상대적으로 아주 단순하고 쉬운 수술인 손가락 봉합은 문제없었으나, 하필 잘려진 부분이 손가락 마디인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다른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조금씩 긴장하거나 움직여질 수 밖에 없는 부위.인간의 손가락이 고고하게 혼자서 뻣뻣한 상태로 절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잘린 부분은 봉합이 되었으나 실을 뽑은 후부터 손가락이 심하게 부어 올랐다. 통증이 있었으며 곧게 펴지지도 않았다. 조금 기다려보자는 전문가들의 의견으로 몇 주를 기다렸으나 부기는 빠지지 않은 채 벌써 두 달이 지나고 있다.


수술 후 처음 소독을 할 때 손이 굳지 않도록 조금씩은 움직여야 한다고 했던 의사 선생님은 이제 와서, 손을 움직이지 않았어야 했다고 했다. 선생님이 잘못한 부분은 없다. 수술 후 관리의 문제였을 것이고 그보다 먼저, 하필 손마디를 잘라버린 내 왼손이 문제였다. 왼손의 힘이 오른손 보다 센 내가 문제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 수십년만에 다시 손을 다쳐보니, 인간의 몸은 하나하나의 기능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겠다. 오른손 집게 손가락을 사용하지 못하니 일상 생활 전체가 아주 불편했다. 일의 효율은 떨어졌고, 수업의 질도 계획보다 부실했다고 스스로 느낀다.


다음 주부터 다시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여름도 오는데 큰 일이다. 전반전, 후반전도 모자라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답답하다.

수술 후 석달 째. 손가락이 부어 올라 있다.

포스트 스크립트1.

이로써 나의 몸에는 다친 자국이 하나 늘었다.

1980년대 어느 날에는 이마에 하나, 다리에 여러 곳 화상자국이 새겨졌다. 90년대엔 손등과 손가락에 몇개의 상처를 간직한 채로 몸이 성장해 버렸으며(열손가락을 다쳤는데 모든 손가락에 흔적이 남았다. 성장하면서 흔적들도 당연히 커졌다), 2000년대 들어 간단한 외과 수술을 한 번 받았다. 2021년 3월에는손가락 봉합도 해 보았다. 살펴보니, 이마에, 다리에, 어깨아래에, 손가락에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잊혀지는 사건과 이야기들,

타인에게 나의 리즈 시절이라는 제목이나

“라떼는 말이야”와 같은 영웅담으로 전해지지 않을

아주 개인적이고 사소한 몸의 이야기들..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잊어가며 사는데도

몸은 나의 역사를 모두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진정한 나의 생활사 아카이브는 바로

지금 살아있는 내 몸, 그 자체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기억이 사라지거나 내가 과거를 잊고 지내도,

부모나 친구나 병원의 기록들이 나를 잊어도,

너 자신은 너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의미인가.

새삼 신기하다.

내 몸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나의 몸, 나의 생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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