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다

[계절의 오행](2023)_10NOV22

by 정연진


최근 소설 한 편을 읽었다. 나는 소설을 거의 읽어본 적이 없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웠던 귀에 익은 적품들은 마치 내가 읽은, 또는 아는 작품들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황순원의 <소나기>라던지,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라던지, 아니면 김소진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던지 하는 한국소설들은 내가 이미 작가와 제목과 대략의 줄거리와 한국문학사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그 원문을 읽어야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동안 내가 읽어본 책들은 어떤 책들이었는지를 돌아보니 몇 권의 베스트셀러들 가령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던지 <비밀> 이라던지 하는 번역서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단 한번도 소설을, 한국 소설책을 찾아 읽어본 적이 없다. <엄마를 부탁해>도, <채식주의자>도 나는 아직 읽지 않았다.


나는 소설에는 관심이 없었다. 원래 '창작'형 인간도 아니지만 창작에 관심을 두어 본 적도 없다. 학교나 직장에서 알게 된 사람들 중에는 국어국문학 전공자들이 몇 있긴 했지만 그들과 한국 소설에 관한 대화는 물론 학창시절 교과서에 나온 작가나 작품을 가지고 토론을 해 본 적도 없었다.(아마 이공계 전공자인 나와 그들의 공통분모는 '그들 입장에서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나는 토론동아리나 모임에 참여해 본 적도 없고, 소설 창작에는 관심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주변에서 누군가 한국 소설을 자주 읽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닌것 같다. 심지어 읽어볼 만한 책을 추천해 준 사람도 하나 없었다. 내 주변에 책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도 이번에야 깨닫게 되었다.


학교의 선생님들이나 연구자들은 달랐겠지만 그들 역시 수업을 위한 교재나 자료, 또는 자신의 논문이나 수업을 위한 독서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학교에서 대부분 선생님(교수님)들은 이미 학창시절에 대부분 문학소녀이거나 문학소년이었던 베이비부머 세대들이었거나 386세대들이어서 그들은 이미 한국소설들을 읽으며 자라온 세대였다.


내가 시험을 위해 암기했던 소설제목과 작가들이 내 선생님들에게는 같은 학교의 동료였고, 동시대의 작가들이어서 실감하는 바는 꽤 다른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만난 동료 중 한 사람은 소설가 송기숙 교수의 제자였다거나 다른 한 사람은 소설가 한승원 선생님에게서 수업을 받았다는데 나는 사실 이 유명한 작가들도 거의 처음 들어보았으니까.


모르는 사이 나는 한국문학 전공자도 아닌 것이 완전히 외국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인문학도도 아닌 것이 또 그렇다고 최신의 과학을 전공하는 공학도도 아닌 채로 이십대를 보냈던 것 같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났더니 내가 읽은 책이라고는 그 당시에 그냥 서점의 베스트셀러였던 도서들 몇개, 주변의 친구들이 손에 들고 다니거나 했던 책들이나 과제를 위해서 참고해야 했던 자습서 식의 도서들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첫 직장에서 잠깐 동안 <문화>와 관련된 자료조사를 하면서 현대 소설의 제목 몇 개를 들어보았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한국문화나 전통이나 그런 것들을 인식하고 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어디선가 들어보았거나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이름이 정말 '아는 사람'일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무진기행>은 그래서 내가 처음 읽은 첫 한국소설이 되고야 말았다. 작품의 마지막 문장에서 윤희중이 느낀 그 감정처럼 나도 모르게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떤 책무감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한국에 대해서 이 정도는 알고 있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무진기행>을 읽어서, 늦었지만, 다행이다. 늦었지만 읽어보았으니 용서가 되려나.


내가 읽은 첫 소설은 이제 <무진기행>이다. 오리가 처음 자신이 본 생명체를 엄마로 알고 따라다닌다고 했던 것 같은데 처음은 언제나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 같다. 나는 이 소설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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