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다른 삶을 생각해본다.
인적 드문 주택 거리를 킁킁거리며 탐색하고 뛰노는 강아지를 보면서, 아파트 밑에 보금자리를 잡은 고양이 가족을 보면서, 고성 앞에 서있는 소나무를 보면서, 저들의 삶을 생각해본다.
언제 나는 고양이가 되고 싶었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햇살 좋은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거나 한가로이 거니는 고양이가 부러웠다.
또 언제는 눈을 뜨면 햇살을 받으며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다 낮잠에서 깬 할머니가 되어 있었으면 했다. 나의 날들이 순식간에 다 지나가길, 이미 다 겪고 지나간 평화로운 할머니의 단꿈 이길 바랬다.
다른 삶을 생각해보고 수십 년씩 인생을 건너뛰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은 현재의 나의 삶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급하면 급하다고 느리면 느리다고 서두르는 탓에 정작 지금 순간의 소중함을 놓치고 흘려보내며 앞만 보기 일쑤였다. 목적이 무엇이고 어딘지도 모른 채 그저 앞만 보았다.
현존에 관련된 책을 읽는 요즘 내가 언제 현재를 살았는지 생각해본다. 몇몇 인상 깊은 찰나의 순간들뿐이었다.
평소의 난, 지금의 나의 호흡과 지금의 평화, 지금의 안전을 외면했다. 미래의 불안에 과거의 상처에 마음을 빼앗겼다.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호흡과 존재 역시 놓치고 있었다.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가 아닌 현재. 현재에 존재하고 현재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하여 관습적으로 해오던 판단을 멈추고 그저 ‘앎의 상태’로 만들어 모든 사람과 만물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랑을 위한 현존의 공간’을 만드는 것.
지금의 나의 상태가 내가 바랐던 평화로운 할머니의 상태가 아니란 법이 없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지금 이 순간, 이 순간의 나에겐 아무런 문제도 제약도 불편함도 없다. 나는 앉아 그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나의 호흡에 집중해본다. 고요한 평화가 밀려온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연습을 수시로 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