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스타트업 3년이 내게 가르쳐준 것 (1)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문성을 갖추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각종 자격증을 따거나 강좌를 듣는다. 회사에서는 하나의 직무에만 집중하여 일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전문성을 길러 specialist가 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특정 직무나 스킬을 쌓는 것만이 전문성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전문성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1) Skill-based expertise : 특정한 기술에 기반한 기능적인 전문성. 흔히 직무와 연관된다. 데이터 분석, 개발, 디자인, 마케팅, R&D 등 해당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갖춘 사람을 전문가라 한다.
2) Domain expertise : 특정 산업/분야에 대한 인사이트와 경험을 가짐으로써 나오는 전문성. 이커머스, IT, 모빌리티, 패션, 식품, 플랫폼 등 어떤 산업 분야 내에서 시장과 고객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을 전문가라 한다.
상술한 두 가지 전문성 사이에는 우열이 없고, 개인의 커리어 플랜과 목적에 따라 어떠한 전문성을 쌓을지 선택하면 된다. skill-based expertise는 관심 있는 산업 분야가 특별히 없는 상태에서 하고 싶은 직무가 명확한 사람에게 적합하다. 예컨대 데이터 분석을 할 수 있다면 패션 회사에 일하든 식품 회사에 일하든 상관없는 사람이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은 조직의 규모가 충분히 커서 직무별로 업무가 세분화되어 있는 곳에서 본인의 역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다. 본인이 잘하는 것만 잘 해내면, 나머지는 다른 팀과 동료들이 채워주기 때문이다.
domain expertise는 본인의 역량을 한정된 직무에 가두지 않고 관심 산업 분야에 대해 전문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적합하다. 초기 스타트업에서 다양한 직무를 두루 경험하며 그 조직이 활동하는 산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면서 전문성을 쌓아나가는 경우가 많다. 혹은 skill-based expertise를 가진 사람이 관리자급이 되어 시장과 미래를 보는 안목으로 사업 방향성을 제시해야 하는 위치에 가는 경우, 특정 분야에 집중하여 domain expertise를 기를 수 있다.
Skill-based expertise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문성이기에 이 글에서는 domain expertise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내가 domain expert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 더 잘 이야기할 수 있기도 하다.
초기 스타트업에 합류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직무에만 집중해 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매우 한정된 자원과 인력으로 모든 일을 해내야 하는 조직이기에, 대부분의 초기 멤버들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시드 투자도 받기 전의 스타트업에 들어와 3년을 보내는 동안 '디자인과 개발 빼고는 다 해봤다' 자부할 정도로 모든 일을 두루 경험했다. 데이터 분석, 콘텐츠 기획, 마케팅, 브랜딩, 프로모션, MD, UX/UI, 물류, CS 등 커머스와 플랫폼 사업에 필요한 모든 직무를 직접 부딪혀가며 경험했다.
나도 한 때는 데이터 분석이라는 특정 직무에 집중하고 싶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관련 강의도 많이 듣고 책도 읽으며 전문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당시 회사에서 필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당장 어떤 일이라도 해서 팀원들을 이끌고, 사업을 일으키고 돌아가게 할 능력이 필요했다. 그때 나는 회사에 필요한 일을 하기로 결정했고, 그것이 domain expert가 된 출발점이다.
혹자는 나를 generalist라 생각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specialist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직 과정에서 이 생각은 외부 평가자들에 의해 더욱 공고해졌다. 지난 3년 간 채식/비건 분야의 1등 플랫폼 기업에서 일했고,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직무를 통해 다각도로 시장과 고객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시장의 성숙도, 시장 내 플레이어들의 전략과 성과, 소비자의 pain points와 needs, 상품 트렌드, 제도와 정책 현황 등 그 도메인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지식과 통찰이 3년 간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어떤 기업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소비자들 사이에서의 인식은 어떤지, 시장의 진짜 크기와 성장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등 언론에 피상적으로 거론되는 정보들만으로는 알기 힘든 질문들에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 분야에 대한 나의 인사이트와 경험은 유관 분야인 푸드테크&대체식품 분야로의 이직 시에 큰 플러스 점수가 되었다. 면접 자리에는 나는 전문가로 대우받았고, 단순히 내가 면접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가고 싶은 회사를 고르기 위해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들이 나를 평가하기 위해 한 질문도 있었지만, 내가 알지만 그들은 모르는 domain expertise를 알기 위한 질문들도 있었다. 내가 지원한 어떤 회사의 대표는 나에게 이런 말도 했다.
"염치 불고하고 부탁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ㅇㅇㅇ에서 식품사업 부분에 대한 해석을 정리한 자료가 있는데, 이 자료에 대한 신랄한 평가가 가능하실까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들 모두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ㅇㅇㅇ님께서 이쪽 영역에서 사업활동을 해오셨기에, 또 관심 있다 말씀하셔서.. 전문가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내가 팀장으로 있던 팀의 구성원 일부는 '우리 조직에서 전문성을 쌓기 힘들다'는 말을 했다. 그들은 skill-based expertise를 키우고 싶은 사람들이었고, 이들에게는 초기 스타트업은 추천하지 않는다. 시리즈 B 단계를 지나 회사 내에 명확한 팀이 편제되어 있고 구성원 간 R&R이 구체적인 조직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오직 기술만으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내야 하기 때문에, 경쟁자가 많고 전문가로 불리기까지 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취직이나 이직을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씩 질문해보면 좋겠다. 나는 분야에서 일하든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는 특정 직무가 있어 이 일을 오래도록 하고 싶은가? 아니면, 나는 직무와 상관없이 꼭 일하고 싶은 관심 분야가 있는가? 이것에 따라 추구하는 전문성의 종류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본인에게 잘 맞는 길을 선택해야 본인의 진가를 세상에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