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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양 Jun 25. 2023

[18화] 사랑받을 용기

이해받지 못한 마음

이봐 젊은 친구야, 잃어버린 것들은 잃어버린 그 자리에
가끔 뒤 돌아보면은 슬픔 아는 빛으로 피어
< 잔나비, 슬픔이여 안녕 中 >





저의 이해받지 못한 마음을 통찰한 뒤 일순간 깊은 탄식이 나왔습니다.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을 때 서러움과 버림받을 것만 같은 두려움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고통과 분노는 우리 식구들 그리고 친척들까지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다듬어지지 않은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욕심이 되어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남에게 상처를 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서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하고, 부끄러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재빨리 타인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이해하지 않으니 미워하게 되고, 서로 마음을 내보이지 않으니 서로 사랑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럽고 서러운 마음은 쌓이고 쌓여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만 이해받겠다는 편협함을 넘어 독재적인 태도가 되어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서럽고 아프게 만들었죠. 모두가 이런 고통을 가지고 살았다는 걸 미루어 짐작하니 참 어른들이 안쓰럽고 불쌍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른들에 대한 제 마음 안에 있던 상처와 원망은 바로 누그러지더군요. 어린시절 제가 사랑받지 못하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이해되었습니다.


사랑이란, 나와 타인의 마음, 타이밍, 상황, 방식 등 모두 다름을 인정한 채 거리를 두고 서로 맞춰가는 것인데, 우리 가족들은 상대와 나의 모든 마음이 손벽이 마주치듯 일치해야 마땅하다는 전제를 깔고 서로를 통제하고 통제당하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진실한 욕구보다 다듬어지지 않은 이기심만 채우기 바빴죠. 특히 저희 엄마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것 외에 것은 모조리 열외에 열등한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엄마 뜻대로 되지 않거나 타인이 나와 같지 않으면 소외되고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실망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수치스러워하고, 회피하고, 미워했죠.  


과거에 저는 저의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고상하고 품격 있는 태도라고 여겼습니다. 돌아보니 지질하고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태도였습니다. 저의 사랑받고 싶은 과도한 욕구는 어렸을 적 부모님의 훈육을 통해 남을 침해하지 않을 정도로 잘 다듬어졌어야 했습니다. 그 훈육의 결핍이 욕구조절을 하지 못하고 억누르기만 하면서 분노를 키우는 어른아이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 분노가 나를 공격하거나 남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뒤늦게라도 꾸준히 저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과거에 내 입맛대로 사랑받고 싶은 욕심덩어리를 상처와 슬픔으로 다듬어, 나와 타인을 존중하며 마음을 주고받는 유연하고 매너 있는 마음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제 마음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오해는 풀리고 제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자꾸만 뒤집어집니다.   


사랑의 실패는 사랑의 교훈을 남긴다.



모든 사람의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 자체는 매우 소중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100% 받아들여질 수는 없습니다. 내가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잘 다듬어 내비쳤을 때, 상대방은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일 수 있고, 받아줄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일지라도 받아줄 의사가 없을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한마디로, 나의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존중함과 동시에 타인의 주도권과 선택권을 존중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저의 주도권과 선택권도 존중받을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건 소중한 기쁨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무의식적으로 남의 마음을 받아주지는 않고, 미움은 받고 싶지 않아서 눈치를 보는 습관을 고쳐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수용할 용기를 내는 것. 내가 내 마음을 수용해야 타인의 마음을 수용할 수 있고, 타인의 마음을 수용하는 것은 나와 상대방의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수용하는 능력은 즉 나의 사랑받는 능력이 되고, 사랑받을 용기를 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제 가치관이 바뀌니 더이상 '내 욕구는 소중하지만, 네 욕구는 소중하지 않아' 식의 이기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더이상 만나지 않게 되더군요. '내 욕구가 소중한 만큼, 당신의 욕구도 소중합니다.'라는 성숙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면서 즐거운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었죠.

 

돌이켜보니 저는 지금껏 저의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무시했기에 주변 사람들의 사랑받고 싶은 욕구도 캐치하지 못했고, 사람들이 저에게 주는 친절과 사랑도 고마워하지 못하고 흘려버렸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에 눈뜬장님이었죠. 누군가를 사랑하는 능력이 한참 부족한 부모님과 친구들 마저도 저에게 나름대로의 사랑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는 수많은 세월동안 그들에게 상처받고 서운한 것만 기억하고 있었네요. 그렇게 저는 지난 슬픔을 삼키고 사랑받을 용기를 내면서 제 인생의 스위치가 '부정성'에서 '긍정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껏 벌어졌던 모든 불쾌한 일들은 저의 사랑에 대한 잘못된 관념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모든 원인은 제 마음에 있고 벌어진 현실은 결과였죠. 그래서 벌어진 현실을 부정할 필요도 없고 남을 원망하거나 컨트롤하려고 집착할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참 신기하게도 벌어진 현실을 제가 컨트롤할 수 없지만 역설적으로 앞으로 벌어질 현실은 모두 바꿀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자기 확신의 길은 더 선명하게 보이더군요. 제 분노의 나침반은 정확히 자기확신의 기준을 '남'이 아닌 '나'를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과거에 부모님이 필요하고 원하는 기준으로 사회적 성과를 이뤄 남에게 인정받아서 자기확신을 쌓으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 나의 내면의 욕구를 들여다보고 바깥을 관찰하면서 내 주체적인 행동으로 차곡차곡 자기확신을 쌓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비하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남의 눈치도 볼 필요 없었습니다. 자기확신의 기준은 저에게 있으니까요. 그렇게 저는 끝끝내 제 고질병인 자기불신에 기반한 열등감을 완전히 깨부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나의 사랑받고 싶은 욕구에 귀기울여 수용적인 자세가 타인에게까지 흘러넘치고, 내가 내 열망과 기준에 따라 성과를 쌓으면서 결과치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것이 애정욕구와 인정욕구를 해결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너무 많이 자신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고 불신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제가 사랑, 용기, 신뢰을 배우기 위해 발생한 일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지난 모든 시절 인연과 감정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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