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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양 Jun 27. 2023

[19화] 사람은 하나의 세계다

이해받지 못한 마음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




여기 7살짜리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지금 멜론맛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콜라맛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고민 중입니다. 멜론 맛도 콜라 맛도 정확히 모르는 이 아이는 둘 다 먹어본 후 내 입맛에 더 당기는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옆에서 어른이 무서운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혼냅니다. "너 자꾸 네가 더 좋은 맛만 먹으려고 할 거야? 욕심이 많네. 빨리 고르지 못해?!" 순간 아이는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내가 좋아하는 저 어른이 갑자기 저를 혼내며 무섭게 다그치니까 빨리 아무 아이스크림을 골라야 할 것 같아서 냉큼 멜론맛 아이스크림을 집어든 후, 심장을 쓸어 넘기며 아이스크림을 먹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아이는 무엇을 느꼈고 어른에게 무엇을 배웠을까요? 바로 억울함을 느꼈고 분별심을 배웠습니다. 이 아이는 아이스크림의 종류가 2가지 존재한다고만 생각했지, 멜론 맛이 좋은 맛인지 콜라 맛이 더 좋은 맛인지 전혀 모릅니다. 다만 다양한 맛과 내 입맛에 당기는 맛이 궁금했을 뿐이죠. 그런데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어른은 아이에게 더 좋은 것만 먹으려는 욕심이 있다며 일방적으로 판단 내렸습니다. 아이가 왜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고민하는지 물어보거나 이해해보려 하지 않고 단순히 욕심으로 단정 지어버렸죠. 명백하게 어른이 아이를 오해한 겁니다.


* 분별심(分別心) : 나와 너,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따위를 헤아려서 판단하는 마음.        


오해는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아이는 앞으로 무언가를 결정할 때 아이스크림의 다양한 맛을 알아보려는 노력 대신 더 좋은 맛을 가려내서 빨리 먹어야 한다는 조바심을 냅니다. 아이스크림 맛에 서열을 매겨서 멜론 맛이 우월하고 좋은 거라고 단정 짓죠. 콜라 맛은 안 좋은 맛이라고 여긴 후 먹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슈퍼에 가니 콜라맛 아이스크림이 이따금씩 보입니다. 왜 마켓 사장님들은 왜 저급하고, 맛없고, 안 좋은 콜라맛 아이스크림을 비치해 놓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혼자 중얼거립니다. 그리고 멜론맛 아이스크림을 주기적으로 사먹는 자신이 우월하다며 우쭐해하고, 콜라맛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은 열등하다며 혐오합니다. 아이는 이분법적인 사고 습관으로 모든 일, 매 순간에 편을 가르고, 서열을 매기고, 반대편에 있는 것을 혐오하며, 눈에 보이는 불완전한 것들에 늘 불평불만을 합니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다만, 내가 믿고 있는 게 전부다.



위 에피소드는 제가 어렸을 적 실제로 겪었던 일을 토대로 각색한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 친척 어르신께 무언가를 선택할 때 손해 안 보려고 간을 본다고 오해와 비난을 받은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이런 제 자신을 꽤 긴시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빠른 판단을 위해 사회의 기준을 재빨리 취해서 단순화해서 생각하는 습관을 길렀습니다. 그 방법이 유능하고 멋있는 거라고 믿었습니다. 이따금씩 도움이 되는 순간도 꽤 있더군요. 예를 들면, 긴급한 상황에서요. 빠른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제 성향은 빛을 발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 어린 시절의 인생 장르는 마치 사회혁명을 다루는 <도마 안중근> 영화와 같았고, 절대적 상명하복과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은 비장함과 서글픔이 철철 흘러넘쳤습니다. 저는 신념을 수호하는 결기를 지닌 독립투사처럼 언제나 몸을 꼿꼿이 세웠죠. 한때는 주도적이면서 신속하고 진일보를 추구하는 이런 제 모습이 꽤나 멋져 보였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저의 내면세상은 점점 변질되더군요. 정치권력의 부패와 모순을 다룬 소설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처럼요. 스스로가 스스로를 매 순간 의심하고 감시하고 불신하고 이용하고 통제하며 기준과 절도에 맞는 행동을 강요하고 압박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의 등쌀에 못 이겨 노예 같은 무기력한 일상을 보냈고, 생각의 폭은 갈수록 좁아져서 강박적인 사고만 했습니다. 제가 쓰는 언어도 점차 거칠고 극단적으로 변하더군요. 행동은 '내가 옳으니 절대로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다', '나는 이런데, 너는 왜이래?'식으로 주도권에 집착하며 고집을 부리기도 했고, 변화를 거부하면서 매 순간 자기 합리화에 집중한 적도 있습니다. 마치 권력에 맹종하고 아부하는 파시즘과 전체주의와 다를 바 없었죠. 그렇습니다. 저는 제 신념으로부터 배반을 당했습니다. 옳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옳지 않았고, 저에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던게 손실이었고, 진보가 아닌 타락을 하고 있었고, 제가 유능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감정일기를 쓴 지 2년째, 제 내면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동시에 그동안 주변 지인들이 저에게 조금씩 건넨 조언과 행동들이 퍼즐처럼 짜 맞춰지면서 더 큰 판이 보이더군요. 인생조언이라고 감사하게 여겼던 게 저를 호구 잡으려는 개수작이었고, 비난이라고 생각했던 게 제 인생을 관통할만한 조언이었고, 옳다고 생각했던 게 틀렸고, 틀렸다고 생각했던 게 옳았고, 선하다고 생각했던 게 악하고, 악하다고 생각했던 게 선하고,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게 열등하고, 열등하다고 생각했던 게 우월하고, 시간과 상황에 따라 가치판단은 수시로 바뀌고 또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신념/관념의 역동이 한 사람 안에서 변화무쌍하게 벌어지며, 일순간 사람과 사람이 충돌하면서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하여 한 인간은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하다는 식의 정의를 내릴 수 없고, 단지 각자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제 내면세계는 어떤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을까요?

제가 긴시간 스스로를 통찰하면서 가장 힘들었던게 바로 '자기혐오'였습니다. 파헤치고 파헤쳐보니 제가 자신을 이유 없이 미워하고 싶어 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더군요. 온갖 이유와 논리를 갖다 붙이면서요. 곧 죽어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태도. 이것의 정체는 분별심이었습니다. 제 내면세계는 모든 구역을 나눠 자신만의 이데올로기에 갇혀있는 대한민국 7-80년대 사회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부조화와 분란 속에 자신만 기득권을 취하려는 상태. 그것은 '독재체제'였습니다.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렇게까지 괴로움을 겪고 나서야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싶은 열망에 다다르게 되다니. 하지만 그 분별심과 자기혐오마저 제가 사랑을 깨닫기 위한 필요한 단계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현재의 최선은 아니기에 또다른 세상을 맞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후 저는 제 내면세계에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고민 끝에 제 뇌리를 강하게 스치는 단어는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였습니다. 대중이 살아 깨어 있으면서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가 있고, 최고가 아닌 최선의 제도이기에 실수가 허용되며, 화합과 조화를 이루는 것. 이것이 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고, 곧 '자기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쉽게 판단하기 전에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습관을 길러야 했죠.



오해는 또다른 이해,
어리석음은 지혜의 씨앗


꽤 긴 시간 어렸을 적 저를 혼낸 친척 어르신을 미워했습니다.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편협함과 독재적인 태도로 저의 영역을 침범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너무 어렸을 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법을 일방적으로 주입받은 것 같아서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를 혼낸 그 어르신의 세상을 존중하기에 실수를 이해하고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그분의 내면세계는 마치 대한민국 50년대와 같았겠죠. 모든 가족 중에 자신이 가장 똑똑하고 정의롭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서 손 윗사람들에게까지 시시때때로 행실을 지적하고 스스로를 어리석음으로 물들이고 있었던 그분의 세계가 참 황량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해는 또다른 이해이며, 어리석음 또한 지혜로 가는 길이라는걸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고 싶군요. "고모, 당신은 저에게 손해 안 보려고 재고 따지는 욕심쟁이라고 오해하고 비난하셨지만, 이미 당신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타이틀을 혼자 가져가려는 어리석은 욕심쟁이셨습니다. 좋은 타이틀이 아닌 것은 모조리 거부하신 결과, 예의를 추구하면서 예의 없는 행동을 하셨고, 옳음을 추구하면서 옳지 않은 행동을 하셔서 저희 부모님께 상처도 많이 입히셨죠. 하지만 저희 부모님은 그런 고모의 철없는 태도를 끝까지 감내하고 이해하셨습니다. 사랑을 베푼 것이지요. 그리고 당신은 제가 21살 때 모든 사람들 틈에 저를 몰아세우는 실수를 반복하셨지만, 역설적이게도 저는 당신에게 사랑과 자유를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고모의 내면세계에 사랑이 깃들길 빕니다."  


이렇게 저는 당시 제가 느꼈던 분노와 억울함으로 제 내면세상을 바꾸는 성장동력으로 삼았습니다. 앞으로 제 세상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조금은 늦었지만 1990~2000년대의 자유와 낭만, 그리고 문화혁명을 이루는 그런 장면이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아니, 90년대고 뭐고 그게 중요한가요. 지금 다함께 숨쉬고 있는 이 순간이 중요하죠. 앞으로의 제 일상이 참으로 설레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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