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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즐겁게 만들기

마왕 신해철을 기억하며.

by 쓱쓱

매우 애정했던 뮤지션이 있었다.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그대에게>를 부르며 화려하게 데뷔한 무한궤도의 신해철.

이후 신해철은 대한민국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뮤지션이 되었고 수많은 히트곡과 사회적 현상에 대한 굵직굵직한 어록들을 남겼다.

특히 철학적 사유가 일상이었던 그의 음악세계는 깊고 풍부했으며 유니크하면서도 보편적이었다.

마치 꿈이 목전에 와 있는 듯 가슴을 부풀게 했다가 갑자기 눈감아 모른 척하고 싶었던 상처의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내 쓰리고 아프게 하기도 했다.


겉은 마왕이라 불릴 만큼 다크 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으나, 그의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순수하고 여린 영혼의 소유자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삶의 양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너무나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을 접했던 대중들은 대부분 안타깝고 슬퍼하기 전에 부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가장 왕성하게 자신의 음악 세계를 성숙시킬 수 있는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그는 먼 미래의 수많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현재를 통해 보여주었던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아파트 근처 카페에서 라떼 한 잔을 사 집으로 오는 길에 갑자기 그가 생각났다.

가을바람은 상냥했고 하늘을 높고 푸르렀으며 햇살은 적당히 눈부셨다.

언젠가 그가 어떤 시사 프로그램에 나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수로 데뷔하기 전에 그의 목표는 자신만의 녹음실에서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 어찌어찌 겨우 빌린 녹음실에서 시간에 쫓기며 음악 작업을 해야 했기에 마음에 들 때까지 음악 작업하기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다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히트곡이 나왔고 그는 소원대로 자신만의 녹음실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절 이루고 싶었던 가장 큰 목표였고 성공의 기준이었다.

그는 너무나 기뻤다. 드디어 마음에 들 때까지 자신만의 음악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 성취와 달성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몇 주에서 몇 달 정도 기쁨이 지속되었다.


그러다 다시 음악을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목표가 생겼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더 견고히 구축하고 싶었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다.

그렇게 노력하여 국내 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 기뻤다. 자신의 음악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기쁨과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보람으로 그는 행복했다.

하지만 그 기쁨과 행복감은 일주일정도 지속됐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자신만의 녹음실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가요대상을 수상하기까지 음악과 노래를 만들며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과 힘든 과정을 견뎌냈는지.


그리곤 깨달았다.

목표를 성취하는 순간의 기쁨과 행복감은 의외로 너무 짧다는 것을.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쏟아붓는 노력과 인내와 고통의 과정은 또 생각보다 너무 길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지 않기로. 목표를 향해 가는 그 과정 자체를 즐겁게 만들기로.

그래야 성취의 순간에 느끼는 그 짧은 기쁨보다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그 긴 과정에서 오는 기쁨을 더 오래 누릴 수 있게 되니까.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매우 이상적이다.

이상적이라는 말은 그만큼 현실에서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요즘 나는 다시 학문의 트랙에 올라타 열심히 떠밀리고 있는 중이다. 이 트랙의 끝에서 결국 목표를 이루는 순간은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기만 하다면 성취의 순간에 느끼는 그 짧은 기쁨은 오히려 나에게 허무함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진심 과정을 즐겁게 만들고 싶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이상은 쉽게 이뤄지기 어렵지만 언제나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나침판이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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