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좋게 지냅시다.
청소년기 두 번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나는 일자목이 되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목디스크로 발전하진 않았지만,
책을 좀 과하게 본다거나 고개를 기울인 채 음식을 만든다거나 조금만 무리를 해도 어깨와 뒷목이 땅기고 아파 심한 두통까지 이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정말이지 삶의 질이 떨어진다.
특히나 중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점점 더 예민해져서 뒷목을 붙잡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렇다고 바로 병원에 가는 건 아니고,
참다 참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서야 골골거리며 정형외과로 간다.
고질적인 증상이기 때문에 진료와 치료의 순서는 매번 똑같지만 그래도 전기치료를 좀 받고 나면 심정적으로나마(?) 좀 덜 아픈 것 같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정형외과는 의외로 한산했다. 동네에서 꽤 오래 운영되는 병원으로 80%가 어르신 손님이다.
접수를 막 마치고 돌아서는데, 진료실 옆 처치실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아, 안 해! 하지 마! 안 한다고!"
날카롭고 쩌렁쩌렁한 어르신의 목소리가 병원 전체를 울렸다.
휠체어에 탄 엄마를 밀며 아들이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아들은 대략 50대 중 후반, 엄마는 80대 정도 되어 보였다.
간호사 두 분이 옆에 매달려 어르신의 오른쪽 발과 발목에 깁스를 하려고 하자 완강하게 거부하고 계셨다.
아마도 움직이기가 불편하고 또 바람이 안 통해 피부가 발갛게 부어오른 경험이 강한 거부의 이유인 듯했다.
그런 엄마 옆에서 아들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미 엄마의 고집과 거친 거부반응에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얼굴이 퍼석퍼석했다.
그렇게 한참 실랑이하다 결국 간호사의 단호한 태도가 어르신의 고집을 꺾었고 극적으로 깁스에 성공했다.
어르신은 병원을 나가실 때까지 연신 하소연을 하셨는데,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아들은 입을 굳게 닫고 재빨리 병원을 빠져나갔다.
순간 유사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설명이 잘 통하지 않는 나이의 어린아이가 몸을 다쳤을 때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에 필사적으로 거부적인 모습이었다.
생명은, 특히 인간은 존재의 근원에 가까울수록 더욱더 원초적이 되는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 존재의 근원에서 이제 막 벗어난 아기는 유기체로써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지닌다.
당연히 이성과 지성이 있을 리 없는 상태에서 가장 원초적인 본능만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한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충족하기 위해 끊임없이 울고 바둥거리며 웃는다.
잠시도 본능을 지연시키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한다.
그렇게 원초적인 본능을 잘 채워가면서 인간은 성장하고 점점 이성과 지성의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본능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덕분에 사회적 기능을 잘 감당하게 되고 무엇보다 자신이 아닌 타인을 돌보고 살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발달을 이룬다.
하지만 다시 시간이 흘러 우리가 왔던 그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지면 다시 원초적 본능의 상태로 귀환한다.
잠시도 본능을 지연시키지 못하고 역시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한다.
그것이 생명과 삶의 순환 과정이며 결국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우리가 온전히 수용할 수 있다면
비록 미치도록 견디기 힘든 돌봄의 시간이라 할지라도
밤낮없이 우는 아이도 밤낮없이 먹을 것을 찾는 어머니나 아버지도
아주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그 존재의 근원에서 나와 다시 돌아가는 여정 속 지금 여기를 살아간다.
뭐,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만큼 다양한 삶의 모습과 형태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같은 존재의 근원에서 출발했고 언젠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모두 조금은 서로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