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번만 시도해 보자
우리 집은 예로부터 엄청난 육식가인 아빠의 식습관과 그의 강한 DNA를 이어받아 고기를 사랑하는 집안이었다.
아직도 어릴 적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몇몇 장면들이 있는데,
집 근처 동네 정육점 아저씨의 친근한 얼굴과 커다란 냉동 삼겹살 덩어리가 냉동육슬라이서에서 가지런히 썰려 수줍게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
주말 아침이면 잘 달아오른 불판에 삼겹살이 닿자마자 내는 치지직 소리와 삼겹살에서 배어 나오는 기름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뛰쳐나와 깔아놓은 신문지에 현란한 무늬를 만들던 장면이다.
유치원 때부터 아빠는 미로와 같은 골목골목 사이에 위치한 맛집들을 찾아 식구들을 데리고 다녔고
덕분에 나는 육회비빔밥의 육질과 숙성도의 정도와 소스의 풍미와 참기름의 고소함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은 아빠의 빨간 봉고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사방이 갈대로 둘러싸인 평상에 앉아 매콤하고 시원한 오리고기전골을 먹었는데, 오리고기가 이토록 깊고 풍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생애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럼 순전히 아빠의 식성 때문에 절대적인 육식 집안이 되었으냐 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다.
소문에 의하면 엄마는 오빠와 나를 가졌을 때 1일 1 전기구이 통닭을 클리어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고
덕분에 나는 태초부터 닭에게 알 수 없는 운명적 끌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 일화로 멀리 지방에 떨어져 살던 사촌 오빠가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나를 처음으로 대면했던 이야기는 우리 집에 전설로 남아 있다.
이제 막 잘 걷기 시작한 쪼끔한 여자 아이가 자기 머리보다 큰 닭다리를 들고 뜯어먹으며 돌아다녔다는 믿기 쉬운 이야기.
그렇게 고기와 육식은 내 생애 전반에 걸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나의 시어머니는 나에게 '고기 보따리'라는 별명을 친히 지어주셨다.
자,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시댁은 어떠한가.
시댁은 예산과 서산을 배경으로 수년간 식생활을 이어오던 집안으로 굴과 해산물, 나물과 채소로 뒤덮인 식단이 익숙한 집안이었다.
머위, 명이, 더덕, 달래.
구순한 시골 처녀들의 이름처럼 진하고 개성 있는 식물(?)들을 제철마다 먹으며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렝게티의 고독한 육식 동물의 젓가락은 매번 허공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자고로 콩밥이란 밥에 방점이 찍혀야 하거늘,
콩이 메인이 되어 밥이 나그네처럼 스쳐간다면 그만큼 황당한 일이 어디 또 있을까.
이처럼 채식 위주의로 식사를 하는 집안에 시집을 온 나는 종종 당황스러운 순간들을 경험했다.
머위는 쓰고 더덕도 쓰고 씀바귀는 진짜 더 쓰고 굴은 비리고 미나리는 너무 강하고 콩은 너무 많고.
그렇다고 딱히 고분고분한 스타일은 아니라서 나는 어느 순간 딱 잘라 말했다.
"어머니, 이거 너무 써요. 안 먹을래요."
다행히 시어머니는 신식(?)이셔서 매번 이 좋은 걸을 안 먹다니,라는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시지만, 더 이상 권하지 않으셨다.
그랬던 내가,
그토록 강력한 육식가의 혈통을 받아 평생 모든 종류의 육고기를 선호했던 내가,
요즘엔 채식을 하며 살고 있다.
물론 시작은 콜레스테롤의 위험이 가장 큰 요인이 되었긴 하지만, 덕분에 채소와 야채의 진정한 맛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밭에서 나는 채소들은 부드럽고 아삭거리며 달콤하고 순하다면, 들에서 나는 야채는 탄력 있고 질감이 있으며 깊고 풍부하다.
양상추와 양배추는 베이스의 맛이 있고 오이와 당근은 시원함과 달콤함이 있으며 토마토는 상큼함이 브로콜리는 담백함이 있다.
이제 머위는 알싸함이 있고 씀바귀는 여전히 쓰지만 입안에 상쾌함을 남기며 더덕은 씹으면 땅속의 영양분을 섭취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그동안 채소와 야채를 선택하지 았았던 것은 육식으로 점철되어 있던 식단으로 인해 재료들을 깊게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육식형 인간이고 채소와 야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고기는 계속적으로 먹으면서 접하고 경험했기 때문에 고기의 맛이 고도로 개발되었지만,
채소와 야채는 많이 접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 고유의 맛에 대한 개발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어떤 분야를, 혹은 어떤 것을 잘하지 못하고 또는 접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못하는 영역'이 아니라 아직 '개발되지 않은 영역'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사람이 잘 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아직 그 영역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해서 개발되지 않는 것뿐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녀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내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도, 누군가의 칭찬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혹은 특정한 음식 재료를 거부하는 사람도,
모두 그 영역이 충분히 경험되지 못했고 따라서 아직 개발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 인생에서 딱 한 번은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딱 한 번만이라도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보기,
아내에게 당신의 따뜻한 인정이 필요하다고 말해보기,
쓰디쓴 씀바귀를 먹어보기.
이 딱 한 번의 시작이 미지의 영역을 개발하는 첫 단추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