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목적론의 부작용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목적이 있으며(목적론적 존재론) 그 목적은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이후 실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짧은 삶의 시간으로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 엄청난 시간이 흘렀음에도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행복하기 위해서 그 사람과 결혼을 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지금 이 지옥 같은 입시공부를 견디며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데 행복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 다시 물으면 어떨까?
기분이 좋고 즐겁고, 안정감을 느끼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것?
성취감과 뿌듯함을 경험하거나 보람을 느끼는 것?
다양한 좋은 감정과 느낌으로 몸과 마음이 가득 차 오르는 것?
종합해 보면 사람들은 뭔가 긍정적인 다양한 요소들로 고양되거나 쾌적하고 편안한 상태를 경험할 때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뚜렷한 실체를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여타 다른 추상적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명확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행복과 같은 추상적 개념들은 절대적 기준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모두가 만장일치로 합의할 수 있을 만한 행복의 절대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개념은 불완전하다. 따라서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는 불완전한 개념을 쫓아 완전한 형태로 만들고자 하는 불가능한 욕망을 채우는 허무함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가 더 많게 된다.
행복해지려고 돈을 벌고 돈을 벌기 위해서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일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강행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는데, 왠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행복해지려 노력할수록 오히려 불행해지는 것 같이 느낄 수도 있다.
이처럼 행복을 목적적으로 추구하다 보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견디기가 어려워진다.
행복하지 않다는 느낌이나 생각이 들면 삶의 목적이 사라지면서 의미 자체를 잃게 될 수도 있다.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강박적으로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삶이 무의미해지면 생존의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행복염려증은 이러한 고리 안에서 형성된다.
행복을 목적으로 살아가면 행복하지 않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삶이 힘겨워진다.
사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삶을 이어가는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생존을 위해 다시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
특히 행복한 순간들이 넘쳐나는 SNS 게시물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안기며 행복염려증을 부추긴다.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면 불안해지고 뭔가 잘 못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실패감을 느끼게 한다.
행복을 염려하면서 행복을 추구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우리가 겪는 수많은 일들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함께 있다.
행복과 불행은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한 덩어리로 존재한다.
따라서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불행을 더 강렬하게 느낄 수도 있다. 행복에 집착하는 강도만큼 불행도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떠한 상태에 있든 그 상태에 충분히 머물 수 있도록 우리를 위치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고 불행에 심각하게 침잠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그 순간들을 활짝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만의 위치에서 그 과정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그제야 비로소 온전한 자신만의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