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두려움을 느낄 때조차
살아가면서 우리는 종종 자신이 가진 생각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질문 앞에 멈춰 설 때가 있다.
우리가 질문 앞에 멈춰 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현상학적 장 안에서는 그 질문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질문이 이해가 안 되니 답을 찾는 것은 더욱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그냥 냅다 던져진 것 같은 삶을 사는 젊은이가 있었다.
태어나 지금까지 그의 삶 전체로 흐르는 일관된 감정은 자책과 외로움이었다.
분명히 누군가의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축복의 증거였을 그는 모순되게도 사랑을 느끼지 못했고 결국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기를 탓하며 지독한 외로움 속에 스스로를 가뒀다.
시꺼먼 강물이 넘실대는 한밤 중 다리 위는 춥고 서늘했다.
그가 그 자리까지 간 이유는 단 하나였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 지독하고 끈질긴 마음의 고통을 더 이상은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는 고통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삶을 멈추는 것뿐이었다.
다리 위에서 난간을 붙잡고 내려다본 강물은 생각보다 거칠어 보였다.
성난 바람에 덩달아 화가 난 강물은 거대한 검은 물체의 사나운 이빨처럼 위협적이었다.
그 순간 며칠 동안 고통의 수위가 극단까지 치솟았던 그의 마음에 갑자기 변화가 시작되었다.
마치 영원할 것만 같았던 지독한 고통이 삽시간 짙은 두려움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고통을 멈추기 위해 삶을 멈추려던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밀고 들어오자 신기하게도 삶을 멈출 수가 없게 되었다.
분명 고통만 사라진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실제로 그 고통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삶을 멈추려 하자 두려움이 삶으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결국 고통도 두려움도 모두 생명의 처절한 반응이었다.
고통스럽다는 반응도 두렵다는 반응도 모두 생명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성화되어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명은 모든 것을 동원해 기어코 사는 길로 나아가게 한다.
그것은 굳이 진화론과 생물학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인정하게 되는 생명의 경향성이다.
생명은 언제나 사는 길로 나아가는 경향성을 발현한다.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고 느낄 때조차 나를 이루는 가장 기본 단위인 생명은 언제나 사는 길로, 언제나 성장하는 길로, 언제나 실현하는 길로 나아간다는 이 기본 전제를 믿기 바란다.
그럴 때 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의 경향성이 우리를 절대적 위기 순간에서 그의 본질대로 이끌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