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인생에도 필요한데...
보일러가 고장 났다.
정확히 말하면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보일러 계기판에 온수 표시가 버젓이 떠 있었는데, 샤워기 물을 틀기 시작하면 바로 에러코드가 깜박였다.
기록적인 더위가 맹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찬물로 샤워를 할 수는 없었다.
현대인답게(?) 인터넷에 에러 코드를 입력하고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보일러의 코드는 전형적인 발화 접촉 에러코드로 여러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보일러에 점화가 잘 되지 않을 때 표시되는 코드였다. 솔루션은 보일러의 전기 코드를 완전히 뽑았다가 다시 꼽아서 기기 자체를 리셋시키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 코드를 뽑았다가 다시 꼽고 물이 나오는지 확인하자 드디어 따뜻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음하하, 위급상황대처 능력에 대해 스스로 뿌듯해하며 샤워를 마쳤는데, 뒤따라 욕실에 들어갔던 둘째가 소리쳤다.
"엄마! 따뜻한 물이 안 나와!"
결국 A/S 서비스를 요청했다.
기사님이 현장에 방문하게 되면 무조건 출장비가 발생한다는 문구가 인터넷 서비스 페이지 안내 맨 위에 쓰여 있었다.
전세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보일러의 연식도 잘 모르고 뭔가 고장이 나서 고치게 되면 집주인에게 전달하고 다시 비용을 요청해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 떠오르자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그래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앞으로 추워질 일만 남았는데, 찬물은 좀 아니지 않나.
A/S 서비스를 요청하고 다음날 수리 기사님을 기다리면서 비용이 많이 나올려나, 출장비는 별도던데 그건 집주인에게 청구하기가 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들이 몰려올 때 즈음 기사님이 도착했다.
기사님은 베테랑답게 보일러를 신속하게 점검한 후 어차피 부품을 바꿔야 할 것 같아서 미리 가져오셨다며 부품 교체 작업을 하셨다.
비용이고 뭐고 물어볼 새도 없이 부품 교체 작업이 완료되고 있었다. 수중에 현금을 가진 것이 없어 계좌이체가 가능할지 조심히 물었다. 그러자 기사님 왈,
"아, 보일러가 아직 3년 무상보증기간이라 별도의 비용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오.
올해 11월이 넘으면 그때부터 고장 시 비용이 발생한다고 했다. 잔뜩 고민하고 있다가 한 번에 시원하게 해결된 듯한 느낌에 마음이 확 가벼워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출장비는 계좌이체로 보내드려도 되는지 물으니 기사님 왈,
"출장비도 무료입니다. 무상보증기간에 제품에 고장이 난 거니까 일체 같이 포함됩니다."
오오.
부품비용뿐만 아니라 출장비까지 모두 무료라니.
아아...
무상 보증 기간이란 참으로 좋은 거구나, 하며 마음에 미풍이 불었다.
기사님을 보내고 콸콸 쏟아지는 따뜻한 물을 맞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삶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무상 보증 기간은 몇 년일까,
아니, 그전에 어떠한 대가도 없이 순수하게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무한한 지지와 도움을 주는 보증된 기간이 과연 우리에게 있었는지, 혹 있었다면 전 인생을 통틀어 허용되는 그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졌다.
비용에 대한 부담 없이, 누군가의 수고에 대한 불편함 없이, 번거로움에 대한 죄책감 없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오류가 났을 때 고치고 치료하기 위해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그 멋진 기간이 과연 우리에게 있었는지, 아니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러한 무상 보증 기간을 제공해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한참 따뜻한 물을 맞으며,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이런 멋진 무상보증기간이 있었으면,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기간을 조금은 더 넉넉하게 오래 보증해 주었으면,
나아가 그렇게 내가 원하는 만큼 나도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무한대의 무상보증기간을 제공해 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해진 몸 때문인지 무상 보증 기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도 조금씩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