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고통
가장 잔인한 달이 4월이라고 했던가.
엘리엇이 ‘황무지’와 같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4월이 생명의 기운이 아예 사라진 겨울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향해 무의미해 보이는 도전을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어 한기만 가득한 땅에서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라일락 씨를 찾아내고 그 척박하고 황폐한 환경에서 생명을 키우기 위해 그 모든 고통을 견디고 버텨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용기를 내는 일은 실제로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4월이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그래서 고통스럽지 않는다면, 생명은 시작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2024년 12월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잔인한 달이었다.
12월 3일.
교과서에서만 나오던 계엄이라는 단어가 삽시간 한국 사회를 덮쳤고 전 국민에게 집단적 불안과 트라마우마를 안겼으며 이미 계엄을 겪었던 세대에게는 강력한 플래쉬백을 일으켰다.
사람들을 거리로, 국회로, 민주주의의 상징적 공간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내몰았고 혹독한 추위를 맞서며 마음의 불씨를 더욱 뜨겁게 불태우게 만들었다.
그간 나의 삶은 손 안 작은 액정으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생생하게 보면서도 내가 있는 지금 이곳의 일상이 별 탈 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 마냥 당연했던 날들이었다.
현실 감각은 화면이 아니라, 내가 지금 숨 쉬고 살아가는 현장에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매 순간 깨어있지 못했던 무지함이 그대로 드러난 날들이었다.
위정자들의 탄핵이 줄줄이 가결되고 온 나라가 첨예하게 나눠고 관련자들의 법적 조치가 취해지는 상황에서 수사권을 둘러싼 국가 기관들의 과잉경쟁과 권력을 지키기 위한 두 당의 소란스러움이 우리의 12월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현실을 살아내는 동안에도 종종 현실을 벗어나 붕 떠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시공간이 갑자기 짜부라져 갇힌 듯 답답했다. 허무주의가 무망감이라는 형태로 찾아올 때가 있었고 그때마다 부단한 인지적 각성이 필요했다.
그러다 오늘, 12월 29일.
항공기 추락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들이 불길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심장이 따끔거렸고 믿고 싶지 않았으며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슬픔과 안타까움이 급격히 차올랐다.
사고 원인과 정황에 대한 다양한 예측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결국 생명들은 끊겼고 유가족들의 울부짖음만은 영원할 것이다.
이렇게 혹독하고 잔인한 12월이 과연 내 생애에 있었던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은 그 자체로 벗어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기에 잠시 비겁하게 철수했다.
그러나 힘든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줄줄이 일어나는 이 지경이 너무나 참담해 울분이 일었다.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지,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지,
진정 언제까지일지.
혹여 12월이 지나 새해가 시작되면 일상이 다시 일상이 되는 기적이 일어날까.
그렇게 기약 없는 희망을 끌어와봐도 요동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고 잠든 뿌리를 깨워내는 4월처럼,
무망의 땅에서 희망을 찾아내고
도무지 틔우지 못할 것 같은 씨앗을 찾아 꽃을 피워내고
깜깜한 어둠 속에 갇혀 웅크린 뿌리에 생명력을 부어주는 4월처럼,
용기를 내고
고통을 견디다 보면
분명히 잔인한 12월의 진가가 꼭 드러날 것이라고
나에게 힘주어 말해주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가 안녕하길.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