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인가, 존재인가.
불안에 삼켜지면 주변이 불타오른다.
더 빨리 무언가를 미친 듯이 계속하는데도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가속이 붙는다.
주변의 이야기들 속에서 잘 마른 장작이 능숙하게 선별되고 곧장 연료화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에 대한 감각과 이를 지켜주던 경계까지 불타 사라진다.
결국 감정은 곧 내가 된다.
내가 그 감정으로만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불안은 그 특성상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주 무대로 삼는다.
대신 과거는 불안을 견고하게 만드는 매우 좋은 토양이 된다.
과거에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기억과 그로 인한 감정이 선명할수록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데 촘촘히 사용된다.
당장에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 즉 그냥 반드시 일어날 것만 같은 예기 불안은 우리를 미치게 만든다.
그것이 쓸데없는 불안이자 걱정이라는 것을 더 명확히 자각할수록 우리는 더 힘들어진다. 스스로 제어가 되지 않는다는 감각은 막연한 불안에 자책을 추가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듯한 불안을 느낄 때 더 높은 강도의 불안을 느끼며 빠르게 해소하고 싶어 한다. 타는 듯한 고통을 느낄 때 삽시간에 고통을 없애주는 강한 진통제를 찾는 것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불태우는 불안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의 평안함을 느끼고 싶어 한다.
분출, 경감, 그리고 해소. 그러니까 증상을 없애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된다.
하지만 불안이라는 것이 과연 해소가 가능할까?
불안은 인간의 본능처럼 인간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매우 주요한 요소다. 흔히 아는 것처럼 인간이 불안을 느끼지 못했다면 결코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생존에 있어 불안은 필수 값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불안 때문에 당장 미치고 팔짝 뛰겠는데,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고 그냥 놓아버리고만 싶은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불안을 없애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면 우리는 더 크고 강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약도 끝도 없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하염없이 지속되는 상태에 지속적으로 놓이게 되는 비참한 상태가 된다.
방법은 없애는 게 아니라, 키우는 데 있다.
불안을 키우라는 것이 아니라, 그 불안을 적절히 다룰 수 있을 만큼 나를 키우는 것이다.
마음의 그릇과 근육을 기르는 것이다. 불안에 맞서 힘겨루기를 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계속 저항을 견디고 아주 조금 한발 앞으로 나가갈 수 있도록 조금씩 힘을 키우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의 그릇을 키우고 마음의 근육을 단단히 만들면 조금씩 불안을 그릇 안에 담아둘 수 있게 된다.
마음의 그릇 안에 담아 놓고 가만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시간을 들여 촘촘히 관찰할 수 있게 되고 그 기원과 파생되는 영향력을 조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 조금 더 지나면 진정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불안을 희석시킬 수 있는 여러 재료를 첨가할 수도 있고 그대로 둔 채 그릇의 질을 향상되게 할 수도 있다.
비단 불안뿐만이 아니다.
우리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나를 고통 가운데로 몰아세우는 다양한 것들을 마주할 때,
도대체 이것들을 어떻게 없애버려야 할까에 몰두하기보다 그에 맞서 나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집중하자.
관점은 시각의 전환에 있다.
시작도 끝도 모두 존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