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양식
그저 앉아서 먹기만 해도 되는 밥상,
몸과 마음을 완벽하게 살찌게 하는 밥상을 참 오랜만에 받았다.
멀리서 기차 타고 오는 딸과 바다 건너 비행기 타고 오는 아들이 한 번에 온다는 소식에 아픈 손목을 부여잡고 분주했을 엄마가 눈에 선했다.
아들 딸이 모두 가정을 꾸린 후 딸은 서울에, 심지어 아들은 바다 건너 제주도로 거주지를 옳기게 되자
명절 때조차 함께 모여 밥 한 끼 먹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다.
사는 게 뭔지,
직업적 특성상 명절 땐 더 바쁜 오빠와 딱히 하는 거 없이 그냥 바쁜 딸은 언제나 삶의 시급성 앞에 쉽게 순응하기도 하지만,
엄마는 그런 우리가 항상 더 우선했기에 오히려 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야야, 이 길이 어딘데 오냐, 나중에 한가할 때 와, 시간 날 때. “
하지만 알다시피 시간이란 사실 만들지 않으면 절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기에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은 매번 후순위로 밀려났다.
무엇보다 한가해지면 또 다른 무언가를 하기 바쁜 게 나라는 인간이라 작정하지 않으면 일 년에 한 번도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할 때도 있었다.
가끔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내가 참 별로일 때가 있다.
특히 부모님에 대해서는...
어떤 것의 당위성이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
뭐, 또 결국 마음이겠지.
엄마는 작년에 일을 하시다 팔목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본능적으로 골반뼈를 사수하고자 손을 먼저 땅에 짚었고 몸의 체중을 그대로 받은 손목뼈는 도리없이 부러졌다.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옮겨가는 동안 엄마의 손목은 퉁퉁 부어올랐고 고통은 배로 뛰어올랐다.
결국 엄마는 장시간 손목에 쇠를 박아 부러진 뼈를 바로잡는 수술을 하셨고 1년 뒤 뼈에 박아놨던 쇠를 다시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처음 수술을 받을 때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을 때도 엄마는 자식들이 절대 오지 못하게 하셨다.
“여기 와 봤자 병실에 오래 있지도 못하고 잠깐 정해진 시간에 면회만 가능하니까 올 필요 전~혀 없어. 그거 잠깐 얼굴 보려고 그 길을... 아예 생각을 말아라. 그리고 요즘에는 간병인이 다 있으니 더 필요 없고.”
두 노인이 씩씩하게 병원에 들어가 수술 수속을 밟고 입원을 하고 수술을 하고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얍삽하게 전화만 해댔다.
엄마의 으름장에 또 순응하는 척하면서...
그러다 마지막 수술을 받은 엄마에게 이번에는 진짜 가겠다고 화를 냈더니 마지못해 퇴원 후 일주일 후에 오라고 겨우 허락을 받았다.
퇴원날에 오면 아파서 엄마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나... 흠...
그렇게 참 오랜만에 온전히 원 멤버로만 이루어진 4인 가족이 함께 밥상에 둘러앉았다.
재철 나물들과 엄마만의 손맛이 배인 김치들, 오빠가 좋아하는 갈비탕과 내가 좋아하는 코다리조림,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샐러드와 다양한 과일까지.
장시간 고속기차로 멍멍해진 머리가 갈비탕의 시원한 국물에 맑아졌고 담백한 나물들에 입안이 즐거웠다.
그것도 잠시 오전에 실밥을 제거하고 왔다는 엄마의 손목에 붙어 있는 커다란 밴드가 보였다.
여전히 불편한 손목을 야무지게 고정하고 오랜만에 함께 모여 맛있게 먹을 아들과 딸의 모습에 여기저기 분주했을 엄마.
씻고 다듬고 볶고 무치고 조리고 찌고를 반복하며 절대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는 말은 귓등에도 안 들어왔겠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키웠던,
우리 가족의 생명을 이어주었던 엄마의 밥을 그때 그 시절처럼 함께 둘러앉아 먹으며,
잠시 동안 세상에서 가장 빠른 시간 여행을 한다.
초등학생시절 휴일 아침 미래소년 코난과 함께 먹던 엄마의 계란찜,
감기로 골골댈 때마다 먹었던 매콤한 쇠고기콩나물 국,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던 사춘기 시절 밤만 되면 출출한 나를 위해 말아주던 시원한 멸치 잔치 국수,
아이들 키우며 살림하는 딸에게 보양에는 특식이라며 싱싱한 아귀와 통통한 콩나물을 듬뿍 넣어 후다닥 볶어내던 아귀찜.
한국인은 김치지! 감칠맛이 듬뿍 밴, 종류만 3,4가지가 넘었던 각종 김치까지.
몸과 마음을 모두 살찌우는 유일한 음식은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결코 대체불가한 것들 중 가장 그리운 것.
영혼의 양식, 바로 엄마의 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