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쩄든 나아가야 하기에
멀쩡이 잘 있다가 갑자기 으스스 한기가 들기 시작한 지가 꽤 되었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에도 나는 4월이 다 지나서야 내복을 벗었다.
아이들은 원래 열이 많다고 하는데, 나는 따뜻한 봄기운이 온몸을 감싸도 내복을 벗으면 피부가 벗겨지는 것처럼 허전해서 좀처럼 벗질 못했다.
차를 타면 항상 멀미를 했고, 장거리를 갈 때면 반드시 한 번은 꼭 속을 게웠다.
매번 차 문을 열고 물 밖으로 겨우 숨구멍을 내놓은 사람처럼 차창에 달라붙어 있었고 실제로 매우 필사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다 커서 여행을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 이유도 아마 어릴 적 생고생에 대한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
몸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멋진 풍경과 산해진미도 그저 시들해지니까.
매 시즌 집안에서는 곰탕 냄새가 났다.
소의 다양한 뼈부위가 커다란 솥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고소하면서도 느끼한 곰탕 냄새가 항상 집안에 배어 있었다.
뽀얗게 우려진 사골 국물에 쫑쫑 썰어낸 파를 올려 소금과 추후로 살짝 간을 한 사골 곰탕은 엄마 나름의 처방이자, 사랑의 증거였다.
멀미가 심한 건 몸이 허약한 증거이고 따라서 몸을 보양하는 최고의 식품은 바로 사골 곰탕이었던 것이다.
사골곰탕과 세트로 장복했던 하나는 바로 어린이용 비타민이었다.
동그란 통에 담긴 동그란 모양의 비타민이었는데, 입안에 넣으면 신맛과 부드러운 우유맛이 묘하게 섞여 실제 묘한 맛이 났다.
친구들과 밖에 나가 놀 때면 항상 몇 개씩 손에 쥐고 나가 친한 친구들 입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친구들은 내가 나타나면 이내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들처럼 모두 입을 열고 기다렸다.
지금처럼 먹을거리가 그리 풍성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비타민을 맛보는 아이들은 마치 다른 차원의 삶을 경험한 것처럼 눈을 빛냈다.
종종 엄마는 비타민이 너무 빨리 없어진다며 하루 권장량을 초과하지 말라고 지나가듯 말했지만,
아마도 딸의 친구들도 같이 키운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비타민을 챙겼을 것이다.
이후 두 번의 출산을 경험하며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경계를 넘어왔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뼈 마디마디가 쑤시다가 근육이 여기저기 당기다가 머리가 핑 돌다가 기운이 쑥 빠지곤 했다.
속 장기가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갑다가 종종 절여왔다.
중년에 들어서면서는 몸의 체온을 유지하는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더위보다는 추위를 느끼는 경우가 더 많았고 덥다고 느끼기가 무섭게 식은땀이 흘러 이내 오한이 들었다.
갱년기라고 했다.
주변 모두가 사전에 입을 맞춘 듯 신기하게도 똑같이 반응했다.
매우 정상적인 발달상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면서도 약속이나 하듯 모두 씁쓸하게 웃었다.
갱년기에 좋다는 건강기능식품과 대체식품과 생활습관과 활동 종목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느 순간 이제 충분히 알았으니 더 듣지 않아도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됐든 우리는 그저 나아갈 수밖에 없으니…
요즘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팥주머니를 전자레인지에 7분 돌려 뜨겁게 데운다.
한참 전에 시댁 친척 어른께서 직접 만들어 주셨는데, 짱짱한 천으로 긴 직사각형 천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을 팥으로 채운 주머니다.
전자레인지에 돌려 데우면 달궈진 팥들이 발열하며 뜨거운 주머니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엄마의 곰탕도 비타민도 없지만, 나에게는 팥주머니가 있다.
왜 7분인지는… 잘 모른다.
딱히 매뉴얼도 없고 지켜야 할 규칙도 없는데, 럭키 세븐이 각인된 결과가 아닐까…
밤새 오한이 들지 않길, 뒤척이다 자주 깨지 않길, 무사히 내일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길…
나에게 빌어주는 일종의 행운의 주문일 수도.
뜨겁게 데워진 팥주머니를 겨드랑이에 소중히 안고 잠을 청한다.
스스로 에너지를 내지 못할 때 우리에게는 외부로부터의 에너지 공급이 필요하다.
도무지 스스로 힘이 나지 않을 때, 차갑게 식어가는 몸을 아무리 필사적으로 움직여도 스스로 발열되지 못할 때
팥주머니를 돌려 데워야 한다.
한 알 한 알 뜨겁게 열을 머금은 팥알들이 깊이 잠이 들 때까지 열심히 우리의 몸을 데워줄 수 있도록
자신만의 팥주머니를 만들어 데워야 한다.
뭐가 됐든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하고 그럭저럭 괜찮은 아침이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