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이란

by 쓱쓱

생각보다 견고한 우리 안의 껍데기들이

거침없는 타작으로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


그리하여 남은 삶의 조각들 아래

결국 마지막으로 남겨지는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 것.


삶에 있어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본질에 집중하게 만들어 주는 것.


생각보다 단순하고 간단한

삶의 법칙을 깨달을 수 있게

우리의 시야를 밝혀 주는 것.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아프고 서러운 것.

깨어지는 고통과 아픔의 눈물을 동반하는 것.


찢기고 깨지는 순간과

마지막까지 붙잡고 가야 할 가치가 드러나는 순간

분리됨과 일체감이 공존하는 것.





눈앞에 보이는 건 까맣게 타버린 거대한 잿더미였다.


이틀 밤낮을 그렇게 맹렬히 태우고도 성이 안 풀렸는지

매캐한 가스를 원료 삼아 잔인한 잔열이 이글거렸다.


대략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우리 가게가 있던 거대한 시장의 절반이 몽땅 타버린 일이 있었던 때는.


아직도 환란, 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면

자연스럽게 그때가 떠오른다.




인간이 쌓아 올린 거대한 문명의 성이

아주 작은 발화에 그토록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은

두려움을 넘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원인은 시장 안에 있던 식당이었다.

가스가 샜는지, 전기가 합선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명확히 기억나는 건

순식간에 타오르던 불길과 사방을 가득 채우던 검은 연기

도무지 온도를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열기와 코를 찌르는 냄새였다.


불은 인간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쉽고 빠르게 번져갔다.

그 속도와 강도가 얼마나 강렬한지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넋을 놓고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시장 근방의 모든 상인들에게 접근 금지가 내려졌고

시장 사람들의 두려움과 안타까움은 공포와 울음으로 변해갔다.

사방에서 높고 빠른 말들과 오열과 통곡 소리가 날아들었다.


학교를 마치고 잠시 집에서 쉬고 있던 나는

미친 듯이 시장으로 달려갔다.


빠르게 가족을 찾았지만, 사람들이 뒤엉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피가 머리로 쏠려 순간 휘청했다.

무엇보다 가족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저만치 오빠가 보였다.

친구들과 함께였는데, 눈동자가 텅 비어있었다.

친구들과 놀다가 소식을 듣고 그대로 달려왔다고 했다.


이제 엄마와 아빠를 찾아야 했다.

오빠와 함께 부모님을 부르며 사방을 뛰어다니다

평소 잘 알던 시장 상인을 만났고 모두 무사하다는 말을 들었다.

불이 나자마자 가게를 빠져나왔고 다행히 아직까지 인명 피해는 없다고 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터져 나오는 눈물을 닦아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지만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됐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얼마 후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있던 아빠를 만났고

엄마가 충격으로 실신하는 바람에 급하게 근처 고모집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나는 급하게 고모집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엄마는 정신을 차린 상태였지만

낮고 깊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아닌데..., 이건 아니야..."


재산의 대부분이 담긴 삶의 터전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수고와 노력, 고단한 땀과 지난한 시간이,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처절하게 경험한 엄마의 얼굴이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당시에는 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어 지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밤새 저 멀리 시장 부근엔

재앙과 같은 불길이 여전히 맹렬하게 피어올랐지만,


나는 늦은 밤까지 고모집 베란다에 놓여있던 흔들의자에 앉아

깜깜한 밤하늘에 반짝이던 수많은 별들과

유난히 빛나던 보름달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넉넉지 못했던 삶의 터전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전혀 그려지지 않는 깜깜한 상황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돌아온 가족들의 밥을 챙기는 엄마의 손길에서

다른 건물 꼭대기에서 상황을 지켜보다 지긋지긋한 바퀴벌레와 쥐는 몽땅 사라졌을 거라며 장난스럽게 웃던 아빠의 얼굴에서

시장 옆에 있던 우리 집은 그나마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던 오빠의 긍정성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반드시 다음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게 귀하고 확고한 믿음이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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