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와 단상_매(일)뭐(라도)쓰(기) 프로젝트_ 7월_3일차
흔적은 반드시 상실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흔적은 반드시 어떤 형태이든 선 존재를 기반하고 이제 그 존재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가 그 자리에 분명히 있었음을 흔적은 필사적으로 외친다.
탁상 위에 동그란 물 테두리는 뜨거운 커피 잔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축 쳐진 뱃가죽과 비키니 라인 아래 수술 자국은 생명이 그 안에서 존재했음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분명히 있었고 이제는 없는 상태. 따라서 상실은 흔적의 필수 요건이다. 상실이 없다면 흔적도 있을 수 없다.
사실 직관적으로 상실은 두 팔 벌려 환영할만한 것은 아니다. 관계적 맥락에서 볼 때 내가 맺었던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때 나와 상관이 있었던 것이 더 이상 나와 상관이 없게 되는 건 꽤 외로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흔적은 매우 정서적 맥락을 함께 지닌다.
한 때 나와 관계성을 가졌던 그 대상에 대한 나의 감정이 여전히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흔적은 우리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상실감으로부터 오는 안타까움, 외로움, 아련함이 있는가 하면 상실 뒤 느낄 수 있는 뿌듯함, 안도감, 단단함 등도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어떤 것의 흔적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한 감정을 느꼈다면 그 흔적이 나에게 큰 의미가 있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도 있는 것 같다.
대학 신입생 시절 교양 영어 교실에 갑자기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외국인 강사가 막 교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분명 그 향기는 풋풋했던 어린 시절 소중했던 사람이 쓰던 향수였다.
한참을 잊고 지냈던 시간이 무색하게 삽시간 몇 년의 시간이 소환되었고 함께 했던 순간들이 일제히 떠올랐다.
이토록 빠르게 순간적으로, 이토록 선명하게 다시 기억되다니.
옅어져 사라진 줄만 알았던 그의 흔적을 느끼며 수업 중간중간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러면서 다시금 상실이 있어야 흔적이 유지된다는 것을 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