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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가 감당해야 해

둘째의 기분 좋은 역습

by 쓱쓱

둘째는 북한도 무서워서 남침을 못한다는 K 중2다.


어릴 때부터 현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나이에 맞지 않게 인생 다 산 노인네 같은 소리를 종종해 나와 남편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섬세하고 예민함을 타고난 것도 있고 위로 언니가 있어서일 수도 있지만

둘째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파악이 빠르고 미묘하게 흐르는 사이의 공기를 잘 감지했다.

요즘엔 종종 인생 사는 게 참 고달프다며 넋두리를 하는데,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걸 듣고 있으면 참 기도 안 찬다.


그런 둘째가 영어 학원을 끊었다.

영어 수학 학원은 기본으로 세팅되는 요즘 분위기에 상당히 반하는 행동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학원차량도 제공이 안되는데 집에서 버스를 타고 그것도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거리상의 문제와 순전한 동기가 되었던 단짝 친구가 학원을 그만둔 것이 핵심 요인으로 판단된다.


학원을 끊겠다고 했을 때 일단 좋다고 했다.

항상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오고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아 내내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학원 가는 걸 귀찮아할 때마다 그냥 집 근처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고 몇 번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참에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몇 군데 고민을 하던 둘째는 영어학원을 다니지 않고 혼자서 공부를 해보겠다고 했다.

물론 결국 혼자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도 나고, 학원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찾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주문을 외웠던 것도 나다.

그런데 자신은 학원이 꼭 필요하고 학원을 다녀야 그나마 공부를 하게 된다고 필사적으로 학원결론주의를 외쳤던 아이가 막상 다 끊고 혼자서 하겠다고 하니 기특한 마음보다 걱정이 앞섰다.


우리는 현재를 이해하는데 과거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하고 파악하여 결정하는데 익숙하다.

사실 이러한 패턴은 아이들과 나 사이에서 꽤 반복되어 왔다. 아이들의 혼자서 공부해 보겠다는 결심은 결국 '역시 쉽지 않네.'로 귀결되며 어느새 학원에 등록하는 식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과거의 기억과 경험이 쓰나미처럼 몰려오면서 걱정과 불안의 불이 탁! 켜졌다.


매번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매번 새로운 기회가 있기에 이번에도 그 가능성에 기대 보려 했다. 스스로 알아서 하겠다는 아이의 말에 모든 걱정과 잔소리를 가슴에 묻고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영어공부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겠다고 선언했다. (지키지도 못할 것을 나는 왜 또 그랬을까..)


그렇게 시간이 묽은 죽처럼 흘렀다.


나는 매우 무의식적으로 집에서 둘째를 마주칠 때마다 그 아이 주변에서 영어의 흔적을 좇았다.

인강이 됐든, 책이 됐든, 단어장이 됐든 뭐든 영어와 관련된 단서가 아주 조금쯤은 있어야 되지 않나, 생각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고(사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침대에 길게 누워 시체처럼 핸드폰을 보고 있는 둘째 방을 힐끔거리다 단전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말을 차마 삼키지 못했다.


"근데.., 혹시 영어 공부는 언제쯤.. 할 계획이야...?"


둘째가 그 특유의 긴 눈을 옆으로 내려트리며 답했다.


"엄마,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좀 기다려주면 안 돼? 다음 주부터 할 거야."

"오오... 그럼 책은 뭐로 살지 결정했어?"

미끼를 문 물고기를 바라보는 낚시꾼처럼 눈을 반짝이는 나를 보며 둘째가 말했다.


"엄마, 그냥 내가 알아서 해 볼게.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

"알지, 알지. 그런데 지금쯤엔 뭔가 움직임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러지. 영어는 언어니까 한 번에 많이 말고.., 매일 한 페이지씩만 꾸준히.. 그게 중요한데..."

"아니, 엄마..?"

"알지, 알지. 그냥 엄마가 안타까워서 그러지. 지금 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할 수도 있으니까."


둘째가 제법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하는 거잖아.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하니까 나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겠지. 안 그래?"


둘째의 역습.

매번 내 입에서 나왔던 중요한 말을 아이의 입으로 듣는 기분이란

역습처럼 갑작스럽고 당황스럽지만,

그것만큼 뿌듯하고 흐뭇한 일도 드문 것 같다.


맞다.

결국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아이는 자신의 현재와 그로 인해 펼쳐질 미래를

나는 그런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끝까지 지켜봐 주는 것을

각자 묵묵히 감당해야 한다.


한방 먹고 얼얼한 얼굴에 활짝 미소가 지어졌다.

잘 자라고 있구나. 참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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