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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Dec 25. 2019

16. 안개 낀 날


12월 24일 화


늘 보이던 바로 앞 도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창밖이 뿌옇게 안개로 가득했다. 여전히 속이 편하지 않아 커피 대신 야채 수프를 보온병에 담아 나와 출근길을 서둘렀다. 두터운 안개 층에 가로등 불빛이 내려서 신비한 마법의 나라에 들어서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길을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라 예상했는데 강변도로에 접어드니 시야가 환해졌다. 더구나 차들도 많지 않았다. 아하... 내일이 성탄절이라 오늘부터 쉬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했다. 


너무 이른 시간에 출근이라 사무실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난방기를 켜고 주전자에 물을 담아 찻물을 끓이고 오늘의 일과를 점검하고 동선을 짰다. 점심때 출장 가고 느지막이 병원에 들러 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오전 업무를 보는 사이에 가족 톡방에 상황이 올라왔다.


‘신장내과 협진 뜸.’

‘경장영양식 식이....’

‘병원비 중간 정산...’

‘간병인비 일주일치 지급함.’


전해질 불균형 때문에 신장내과 협진이 들어온 듯했다. 매일 혈액검사를 하는데 나트륨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간호사의 설명이 어제 있었다. 어디선가 빠져나가는 게 있다고 했다. 그 문제 때문에 퇴원 결정이 유보되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그 정도는 요양병원에서도 처치할 수 있나 보다 생각했다. 


오후에 출장 볼일을 보고 은행을 갔는데 뭔가 이상했다. 인터넷으로 예금한 것을 해지하는데 자꾸 오류코드가 뜨기에 콜센터에 문의했더니 직접 창구에 가서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바쁜데 언제 거기까지 갔다 오냐 싶었지만, 일이 일찍 끝났으니 부지런히 다녀오면 될 듯했다. 먼저 살던 시골 단위 농협으로 가서 여기까지 온 이유를 설명하니, 창구직원이 거주지나 직장의 단위농협으로 가도 된다는 말을 했다. 앗! 창구에 가서 문의하라는 것을 나는 개설 은행으로 알아듣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뭔가 알아듣기 어려운 문제 상황을 어쨌든 창구 직원은 해결을 해서 예금은 해지가 되었다. 


돌아오면서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요즘 너무 급하게 사나 보다 싶기도 했다. 바로 옆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40분이나 차를 몰고 오다니 너무 돌아가는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휴식을 취할 겸 필요한 물건도 사야겠다 싶어서 마트에 갔다. 원래 사고자 했던 것은 욕실 용품인데 지하층에 가서 야채를 한 박스를 포장해왔다. 집에 와서 상자를 풀어보니 너무 많았다.

양배추 한 통, 대파 한 단, 무 큰 거 한 개, 샐러리 한 단, 간장 3개들이 한 상자, 대형 곡물식빵까지...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다. 반쯤은 썩어서 버리게 생겼다.

동생한테 가져가라 했더니 왜 그렇게 많이 샀냐고 물었다.


“글쎄. 잘 먹지 못해서 허기졌나? 오늘 좀 이상해.”

“우리도 장 보러 왔는데, 필요하면 들를게.”


기다리던 동생은 오지 않고, 엄마의 호출이 있었다. 예전에 다니던 병원에 소견서 받으러 왔는데 몇 군데 들렀더니 힘이 빠진다며 데리러 올 수 있냐는 내용이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식들한테 얘기하지 않고 해결하려는 엄마다. 


“병원에서 기다리세요. 20분이면 가요.”


까만 모자를 쓴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병원 앞에 서서 나이 든 딸이 데리러 오길 기다리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딸의 차를 알아보고 웃으며 손을 흔드셨다. 길 위에서, 병원 앞에서, 친정 집 앞 골목길에서 나를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을 너무 많이 보고 있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아버지 병원으로 가야지.”


간호사실에 엄마가 가져온 소견서를 전달하니 담당 간호사가 이게 뭐냐고 물었다. 상황을 설명하니 그냥 갖고 있으라 했다. 

“엄마, 이렇게 가져다주지 않아도 된대요. 가지고 있으라네.”

“예전에 너네 아버지 대학병원에서 재활병원으로 갈 때 서류를 가져오라 해서 몇 번을 왔다 갔다 했었다. 이번에 병원 옮길 때 필요할 것 같아 내가 미리 다녀온 거야.”

“엄마, 병원에서 가져오라고 하면 그때 다녀와도 돼요. 이번에 요양병원으로 가는데 필요한 서류는 이미 보냈대. 병원에서 병원으로 바로...”

“그랬니.. 난 그것도 모르고... 요양원에 들어갈 때도 서류를 해오라 해서 힘들었는데..”

“그런 일은 이제 동생들이 할 테니 엄마는 신경 안 써도 돼요.”

“내가 12년이나 이렇게 병원에 다니면서 돌봐왔다.”


아버지는 어제보다 의식이 또렷해 보였다. 그리고 까칠한 성격도 드러났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익숙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반가울 수도 있다니...


 “환자를 이렇게 세워놓다니, 말이 아니다. 나를 눕혀놔야지...”

 “아버지, 콧줄로 물을 넣는데 그게 몸 안으로 들어가려면 누워있으면 안 되고, 한 시간은 앉아 계셔야 해요. 앞으로 식사도 이렇게 할 건데 그때도 앉아계셔야 해요. 간병인한테 뭐라 하면 안 돼요. 아버지 돌봐주는 사람이에요.”

“알았다. 곰국에 밥 한술 말아서 먹고 싶은데...”


12년간 엄마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곰국을 끓이셨고, 단팥빵을 사드렸고, 블루베리와 땅콩 캐러멜을 갖춰놓고 드렸다. 계절별 과일과 떡도 골고루 드리고 여러 가지 야채와 간식도 늘 챙겨드렸다. 친정집 냉장고는 항상 먹을 게 그득했다. 2년 전까지 아버지는 집안에서 보조기구에 의지해서 걸어 다니셨고 혼자서 냉장고를 열어 먹을 것을 꺼내 드시기도 했었다. 


먹는 것을 즐기시던 분이 입으로 음식을 먹지 못한다니 어떤 심정일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나 같으면 하는 생각은 있지만, 아버지는 어떠한지 잘 모르겠다. 잠결에 일어나려고 목을 일으키기도 하고 불편하다고 콧줄을 잡아당기기도 하는 걸 보면 자신의 상황에 대한 현실적인 자각이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또렷해지셨는데 오늘 나는 황당하게 왜 그랬을까? 은행 일도 그렇고, 마트에서 장보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우왕좌왕하면서 하루가 가는 건가?


병원에서 나와 엄마랑 저녁 먹을 곳을 찾는데도 한참을 헤맸었다.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인가 보다. 


12월 25일 수


안개 낀 날의 방향을 알 수 없는 이상한 행적들이 지나가고, 아버지 퇴원 후 행보도 결정이 나서 좀 편해졌는지 자다 깨다 했지만 실컷 잤다. 9시가 다되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일어나셨어요?”

“지금 일어났다. 아주 곯아떨어져 길게 잤다.”

“오늘 어떻게 하실 거예요?”

“셋째가 데려다준다면 가고...”

“10시까지 기다려봐서 셋째 일어나면 함께 가시고, 못 일어나면 전화 주세요. 제가 갈게요.”

“그래.”


IT계통의 일을 하는 셋째는 밤에 일을 많이 하고 오전에 늦게 일어나는 편이다. 독립해서 살다가 2년 전에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만 있게 된 이후로 다시 본가로 들어왔다. 그 덕에 다른 형제들은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대학병원으로 이송과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데 가장 빠르게 의사표현을 했었다. 공간적 거리감이 가장 가까운 자식이다.


엄마와 전화 통화 이후 잠은 이미 달아났고 뿌연 연무가 있지만, 모처럼 창문도 활짝 열고 환기를 시켰다. 춥다기보다 시원한 느낌의 순환이 일어나는 듯했다. 10시가 되니 전화가 울렸다.

“셋째가 못 일어난다.”

“제가 준비하고 30분쯤 후에 출발할 테니, 엄마도 준비하세요.”


어제 사온 야채들을 세탁실 쪽에 넣어 놓고 출발했다. 휴일의 강변도로는 한가했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다가 건너야 할 다리의 진입로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 다리를 건너서 빙 돌아 엄마네 골목에 들어선 것은 예상보다 15분쯤 후였다. 늘 그렇듯 골목 끝에 나와 계셨고, 3층 현관 앞에는 셋째가 엄마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막 일어난 모양이다.


“셋째 일어났는데, 같이 안 간대? "

“머리가 터지게 아프단다. 저녁에 간대.”

“오늘도 날이 따뜻해. 올해는 참 이상하지 겨울 같지 않고 자꾸 봄 같은 느낌이야.”

“그러네. 이렇게 날씨 좋을 때 가셨으면 좋겠다.”

“에.. 막상 그러다 일 나면 울고 불고 난리 치려고...”

“난 안 그런다. 며칠 전 꿈이 안 좋아.”


이런 대화를 나누며 병원 주차장에 들어섰다. 24번 기둥 옆에 빈자리가 있어 차를 세우고 옆에 엘리베이터를 눈짓으로 가리키니 엄마는 싫다며 저만치 앞서 가 버리셨다.


병실에 들어서니 아버지는 주무시고 계신 건지 기력이 없는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엄마가 여보야 왔다고 해도 반응이 별로 없었고, 나도 알아보지 못했다. 몸을 건드리니 눈을 뜨긴 했지만, 이내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간병인 자리에 앉아있는 엄마가 힘이 빠져 보였다.


“엄마, 저녁에 동생이랑 다시 오고 그만 갑시다. 엄마도 못 알아보고 주무시는데..”

“어제는 생생하더니, 오늘은 영 아니네.”

“저희 집으로 가요. 점심해 드릴게.”


그렇게 예정에 없이 엄마를 모시고 집으로 왔다. 집안에 들어서니 겨울 햇살이 주방까지 들어와 있었다.

“엄마, 소파에 누워 쉬세요. 아니면 안방 침대로 가셔도 되고...”

“햇빛이 좋구나. 소파가 좋다.”


이내 엄마는 옆으로 누워 양손을 마주 잡고 눈을 감으셨다. 잠깐 낮잠을 잘 때는 저렇게 양손을 깍지를 낀 채 가슴에 모으고 주무신다고 했다.


쌀을 씻어 밥솥에 넣고, 다시팩을 꺼내 육수를 낸 후 된장찌개를 끓이고, 오이랑 사과를 썰어 살짝 무쳤다. 별다른 반찬은 없지만, 이렇게 밥을 해드리는 게 사드리는 것보다 낫겠다 싶었다. 동생한테 전화를 걸었다.


“막내야. 점심 안 먹었으면, 건너와 같이 먹자. 엄마 모시고 왔어.”

“우리 이제 일어나서 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어. 요양병원 결정하고 나니 모처럼 길게 잤네.”

“그럼 제부도 함께 건너와, 올 때 김치 좀 가져와라. 맛있던데...”

“알았어.”


전화 통화 소리에 엄마가 눈을 뜨셨다.

“막내 온다니?”

“네. 오라고 했어. 김장 담근 거 맛있길래 한 포기 가져오라 했지.”

“며칠 전 병원 갈 때 한 통 가져왔더라. 내가 해줘야 하는데 이번에는 얻어먹네.”


막내네 부부는 김치와 소고기를 가져왔다. 채식 밥상이 될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쌈배추 있던 거를 꺼내놓으니 엄마는 고기는 드시지 않고 배추만 드셨다.

“이런 알배추가 좋아.”

“고기도 좀 드세요. 맛있네.”

“난 고기보다 야채가 좋아.”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누가 하냐며 장난치듯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엄마가 작업실로 쓰는 방에서 책을 한 권 들고 나오셨다.


“지난번에 빌려간 거 3권 다 읽었다.”

“벌써요?”

“그럼. 밤에 잠이 안 오면 책 읽지. 여행 책 좋더라.”


햇살이 잘 드는 소파에 앉아 엄마가 펼쳐 든 책은 ‘천국보다 아름다운’이었다. 하필이면 그 많은 책 중에 저것을 들고 나오셨을까? 몇 년 전에 품절된 책이라 중고도서로 나와 있는 것을 구입해서 갖고 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천국에 간 남자가 자신을 못 잊어 자살한 부인의 영혼을 찾아 지옥으로 가는 이야기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011346)


엄마는 책 표지를 먼저 앞뒤로 살펴보시더니 가방에 넣으셨다.


“건너편에 맛있는 커피집 있는데 가실래요? ”

“난 믹스 커피도 좋다.”

“막내네 했던 것처럼 커피 볶는 집이야. 분위기 좋던데,  제부는 어때?”

“저 거기 안 가봤어요. 가요.”


 색다른 인테리어에 천정이 높은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여느 사람들이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는 것처럼 그렇게 한낮을 보냈다.


엄마를 집으로 모셔다 드리면서 날이 좋다는 이야기를 다시 나누었다.

책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엄마는 저 책을 다 읽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실까?


엄마의 의식에 따른 끌림으로 선택한 책인가 보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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