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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Feb 01. 2020

19. 집중치료실

1월 6일 월      


문화센터에서 그림 수업이 끝나면 엄마 모시고 병원을 다녀올까 하다가 면회 시간이 애매해서 그냥 집으로 왔다. 집중치료실 면회시간이 오후에는 5시 반 - 7시, 7시 반- 8시 반이다.      


간단하게 장 봐 온 것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대학 친구 톡방에 알림이 떴다. 친구 부친상이란다. 작년에도 한 건 있더니만, 올해도 시작이다. 이제는 부고가 익숙한 나이다. 일 년에 두 번 만나서 각자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는 있었지만, 딱히 병환을 앓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는 친구였다. 6명 친구 모임에서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사람은 이제 두 명이다.      


3일장인데 첫날 저녁에 부고가 떴으니 조문 갈 날은 내일 하루뿐이다. 외국에 간 친구, 멀리 여행 간 친구, 연초 인사업무라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친구들이 개별적으로 부조를 부탁해왔다. 밤늦게까지 문자들이 오고 가고 내일 낮에 잠깐 다녀오는 것으로 했다. 명퇴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 친구와 함께 가기로 하고 장례식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제 죽음은 생활 속에 일상처럼 따라다니는 것 같다. 낯선 물건이 익숙해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이 영역은 많은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1월 7일 화     


퇴직한 친구는 밤길 운전하기 어렵다며 낮에 보자고 했다. 점심시간에 잠깐 시간을 내서 다녀오는 게 나도 편했다. 현금을 갖고 다닐 일이 없어 은행 ATM기 찾느라 장례식장과 대학 병원을 한 바퀴 돌고 난 후에야 친구를 만났다. 대학 1학년 때 가끔 집에도 갔었기에 친구 어머니랑 동생들도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40년 가깝게 만났던 친구 얼굴에서는 세월의 흐름을 알 수 없는데, 친구 동생과 친구 남편은 30년이 넘는 그 세월의 흐름이 얼굴에 있었다. 그들 눈에는 내 모습도 그렇겠지 하며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친구 아버지는 병원에 가야겠다며 전화 예약하라고 하신 지 3일 만에 돌아가셨단다. 배가 아파서 아침 일찍 병원에 들렀다가, 다음날 수술받고, 그 다음날 중환자실에서 패혈증으로 돌아가셨단다. 70이 넘은 연세에도 5톤 트럭을 몰고 다니실 정도로 비교적 정정하고, 기질이 강한 분이셨다. 갑자기 돌아가실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친구 가족들은 많이 당황스러워했다.      


“ 갑자기 돌아가셔서 장례 준비는 어떻게 하니?”

“ 그게 참 이상하지... 아버지가 영정사진도 진작에 만들어놓으셨고, 한복 입고 저 세상 갈 거라며 맞춰놓았고, 묘지 터도 몇 년 전에 사놓으셨지. 연말연시라며 손자 손녀들 용돈까지 다 주셨어.”

“ 현재 의식에서는 몰라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은 가족들이 뭔가 특이했던 점을 나중에 알아차리곤 한다더니.. 너희 아버지가 그렇네.”

“그러게 말이야. 내가 원래 내일 여행 가는 일정인데, 나보고 길게 여행 가는 거 싫다고 하시더라... 이럴 줄 알고 계신 것처럼..”     


갑작스러운 죽음의 경우 남은 가족들은 많이 황망하다. 생각지도 못한 이별을 해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막상 닥치면 결코 오지 않아야 할 일을 겪은 것처럼 감정 반응이 일어난다. 


평균 수명 80세가 넘는 시대에 78년의 삶으로는  레테의 강을 건널 때가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신기하게도 망자는 이미 죽음에 대한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였다. 어쩌면 본인 스스로 그런 준비를 했기에 빠르게 이별의 과정을 겪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생에 대한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정리하고 있는 것이 있다. 막상 노년의 시기에 어떻게 반응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대로 일어나길 바란다.  평소에 삶을 대하는 태도와 죽음을 대하는 모습이 거의 일치한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요양병원 집중치료실에 누워계신 아버지는 평소에 어떤 신념을 갖고 있었을까? 지금은 거의 어린아이처럼 자극에만 반응하는 상태이니 어쩌면 과거형으로 말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아버지의 삶이 어땠는지는 잘 모른다. 공직 관련 시험을 몇 번 봤었다는 이야기와 30대 중반에 공기업에서 나온 이후로 자영업을 하셨고 술과 담배를 항상 친구처럼 곁에 두고 사셨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와서 술주정을 하거나 그런 적은 없으셨다. 조용히 들어와서 주무시곤 했다.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분인데 저렇게 병실에서 하루 종일 몇 마디 못하고 누워계시는 모습이 내게는 익숙한 모습은 아니다.

      

며칠 전에 막냇동생과 나누었던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와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10년간 카페를 운영했던 막냇동생은 처음에 가족들이 카페에 와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가족들이 카페에 올 수도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저렇게 즐거운 대화가 가능한 가족이 있다는 것이 신세계였다고 했다. 나와 막내의 나이차가 14년이라 내 경험치와는 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좀 더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엄마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이리라.       


막내가 내게 했던 이야기의 배경은  아버지가 아무런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있던 시절이다. 늦둥이 막내를 무척이나 예뻐했던 아버지는 집에서 늘 막내를 옆에 끼고 있었다. 막내가 학교에서 집으로 오면 아버지가 계셨고, 아버지가 차려준 밥을 먹고 안방에 누워서 TV를 보았다고 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지만,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어릴 적 막내동생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거의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같은 부모의 자식이라도 이렇게 기억하는 모습이 다를 수 있다니...      


그 시절의 나는 대학 다니고, 그 후에는 사회생활하느라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몰랐었고, 가정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시절이다. 엄마의 경제생활로 그다지 집안이 궁핍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대학 초반에 아버지와 9시 뉴스를 보며 끝도 없는 말싸움을 하느라 어쩌면 아버지가 말이 많고 대화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기억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다. 9시 뉴스가 끝날 때쯤 골목길에 엄마가 들어서면 나와 아버지의 정치적인 말싸움 놀이가 골목을 울릴 정도였다고 했다.      


내 기억에도 외식을 하거나 여행을 자주 다닐 정도로 여유가 있던 집안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족 모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 년에 한 두 차례 산에 나물 뜯으러 가거나 강변에 놀러 간 적도 있었다. 자연 속에 있는 것을 즐기던 나는 엄마 아버지가 나물을 뜯으러 가고 마냥 숲 속에서 놀았던 때가 무척이나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되돌아보니 그랬던 시절도 아버지가 오십이 넘은 이후에는 거의 하지 않았으니 막내는 별다른 기억이 없을 수밖에...


대략 50세 이후 아버지는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나 사회적 구속에서 벗어난 것처럼 사셨다. 그렇다고 막 사신 분은 아니었지만, 가장의 책임감과는 거리가 있는 분이셨다. 가장의 자리는 경제관념이 뚜렷한 엄마의 몫이었다. 생활력 있는 마나님이 집안을 꾸려가고 있으니 아버지는 좀 더 자유로와졌다고 할 수 있겠다. 더구나 72세 사고 이후로 엄마의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그저 누군가 나를 잘 돌봐주고 있다는 믿음만 생긴다면 그저 누워있는 삶이라도 나쁘지 않게 생각될 수는 있겠다 싶다. 이런 나의 생각도 어디 까지나 짐작일 뿐 실제 아버지의 세계는 어떤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좀 더 일찍 아버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상상만 해본다. 우리네 정서로는 지극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건드리면 안 되는 죽음의 영역일지라도 물어보고 싶다.      


아버지는 인생의 마무리를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1월 26일 일     


집중치료실로 옮긴 후 아버지 상태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3주 정도가 지나서야 호흡기 문제는 조금 나아진 듯했다. 석션 횟수가 줄었고 기침도 훨씬 줄어들었다. 항생제 치료가 잘 되고 있는 모양이다. 3주 사이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두어 번 있었다. 눈 감고 내도록 잠을 자고 있던 시기도 있었고, 식구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매일같이 면회 가는 엄마를 알아보지 못해서 엄마가 낙담한 적도 있었지만, 크게 위험한 상황은 없었다. 체력이 너무 소진해서 그런지 설사가 시작되어 바로 링거액을 맞고 나더니 아버지는 좀 반짝해지셨다. 담당 간병인 말로는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하시는 얌전하고 순한 환자라고 했다. 나랑 엄마가 면회 갔을 때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명절을 지나 식구들이 가면서 간병인의 말을 확인하게 되었다.   

   

“저기 잘생긴 남자는 누구인가?”

“막내사위잖아..”

“그렇네”

“아버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

“101살”

“이제 아버지 돌아오셨네.”


눈빛도 맑아지고, 사람을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손을 가지런히 모으기도 했다. 팔을 들어 올려보라 했더니 전보다는 많이 올리지는 못하지만 들어 올리더니 아프다 하셨다. 엄마가 만져보니 등이랑 어깨와 목이 많이 굳은 것 같다 하셨다. 가족들을 알아보고 이름도 기억하는 것에 식구들은 반가워했다. 그만큼 아버지는 중증환자인 것이다.   면회가 끝나고 나오는데 담당 간호사가 말을 건다. 


“환자분 상태가 위독해지면 상급병원으로 이송하실 건가요?”

“현재로서 연명치료는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요.”

“그러면 다음에 낮에 오셔서 담당 선생님 만나 뵙고 사인하고 가세요.”

“어떤 내용인가?”

“심폐소생술과 상급병원 이송에 관한 의견서입니다. ”

“아.. 네.”     


병원에서 나온 후 가족 톡방에 간호사와 면담한 내용을 올렸다.      


‘담당 간호사 말로는 크게 좋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호흡기 쪽은 많이 좋아졌고 현재 상태가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고 했음. 상급병원 이송 여부와 심폐소생술에 관해 결정해서 사인하라고 함.

각자 의견들 내시죠.‘

‘엄마도 함께 들었는데 다른 가족들 의견 들어보고 결정하려고 함. 난 엄마 의견에 따름.’

‘나도 엄마 의견에 맡길래.’

‘엄마는 상급병원 이송 연명치료 안 하신다고 함.‘

‘그러면 다음에 낮에 병원 면회 갈 때 엄마가 사인하고 오시면 될 듯.’     


아주 간단하고도 담담하게 또 한 번 가족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      


아버지 옆 환자는 할머니인데 면회를 오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나 붙잡고 자꾸 뭘 달라하고 침대 난간을 넘어가서 한쪽 팔다리가 묶여있다. 이날도 어김없이 면회를 하고 있는 동안에 자꾸 사람을 잡아당기고 말을 건다. 이 할머니 환자만 경관 식이를 하지 않는 듯했다. 아버지 뒤쪽에 있는 환자는 전혀 의식이 없어 보였고, 반대편의 환자도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그렇게 누워있는 환자들이 이십 명은 넘는 듯했다. 입구 쪽에 있는 명단에서 연령대를 보니 100세 환자도 있고 98세, 95세도 있고, 40대 환자도 있었다. 새해가 되어 85세인 아버지는 환자 평균 연령보다 젊은 편이다.      


집중치료실은 일정한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정해진 시간에 일제히 식사를 하고, 기저귀를 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을 하고 마치 공장 시스템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일 때가 있다. 면회시간도 정해져 있다. 입구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들어가서 면회를 하고 나올 때 담당 간호사와 환자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갈 때마다 익숙해질 수 없는 병동 특유의 냄새에 무딘 척을 하지만 가끔은 집에 와서도 그 냄새가 나는 듯했다. 하루 종일 그 안에만 있는 아버지는 그 냄새를 의식은 하고 있는지...


유달리 비위가 약한 엄마는 오래 면회를 할 수 없다며, 어떤 보호자는 한동안 환자 옆에 있다가 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그 환자도 전혀 의식이 없어 보였다. 

면회를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엄마가 말을 걸었다.      


“아버지와 마주 보고 있던 침대의 환자가 바뀌었다. 왠지 그쪽을 쳐다보는데 오싹하더라.”

“좋아져서 다른 병실로 갔을 수도 있지... 엄마 혼자 괜히 안 좋은 쪽으로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다행이고..”     


집중치료실 이후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가족들은 전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요양병원에서만 20년 이상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더라.

연명치료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더라.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아버지가 환자로 있으니 세배는 하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끝으로 가족 모임이 끝났다.      

1월 31일 금     


 가족 톡방에 셋째의 문자가 올라왔다. 

‘참, 그저께 내가 심폐소생술 거부 사인했음.’     


집중치료실에 입원한 아버지는 이제 일상이 되었다. 

엄마는 오후에 시간이 되는 누군가와 함께 면회를 간다. 일주일에 두 번씩 퇴근 후에 엄마와 함께 다니다가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만 간다. 대학병원을 전담해서 다니다시피 한 막내는 명절 때 다녀오고 안 가고 싶다 했다. 

“난 요양병원에 있는 아빠를 보는 게 맘이 불편해!”

“그동안 애썼으니 안 가도 돼. 엄마가 자주 가는데 뭘.. 편하게 생각해.”     


신종 코로나 문제로 집중치료실의 면회가 중단되었다는 공지가 떴다.

엄마를 비롯해 가족들은 이제 잠시 아버지를 만나지 않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언제 다시 아버지를 만나러 갈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 상태가 조금은 좋아진 모습을 보고 난 후라 다행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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