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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노란 May 06. 2024

돈으로 행복을 사는 법 3

살림 위임하기

리모델링을 마치고 집이 예뻐진 뒤, 나는 집안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아마 집안일을 좋아하는 주부들은 다들 공감할 것이다. 뒤돌면 어차피 지저분해질 거 알아! 하지만 이 예쁘고 깨끗한 집을 조금이라도 오래 유지하고 싶은걸! 쓸고 닦고 집을 반짝반짝 광내고 정리하는 건 정말이지 신이 났다. 시간을 쓰는 만큼 생활이 더 편하고 예뻐졌으니까.


돈을 들여 TV에 나왔다는 정리업체를 불러 온 집안을 정리했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기에 여전히 구석구석 손볼 곳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릇의 배치를 고치고 옷장에 걸린 옷의 순서를 바꾸었다. 날씨가 좋은 날 새 세탁기로 팍팍 삶은 수건을 베란다에 조르륵 널었고, 각 맞춰 갠 속옷을 착착 넣었으며, 좋아하는 그릇에 탄단지를 고루 채워 넣은 식사를 준비했다. 글로 적어두기만 해도 보람차고 즐겁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대가 없는 즐거움은 없는 법. 나는 전보다 더욱 시간이 없어졌다.


나의 대략적인 일과 표는 이랬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 등교 시키고 헬스장에서 웨이트와 유산소를 하고 돌아와 점심 식사를 한다. 빨래를 돌리고 고양이들과 식물을 정리하고 난장판이 된 집을 정리한다. 자리에 앉아 두 시간 정도 글을 쓰고 한 시간 정도 공부를 하면 아이들이 집에 온다. 아이들 간식을 챙겨주고 시간에 맞춰 학원으로 보내거나 숙제와 공부를 봐주다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한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재우고 나서 남은 집안일을 한다. 빨래를 개고, 설거지를 하고, 다시 난장판이 된 집을 정리한다. 그러고 나면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하루하루 해야 할 일로 꽉 찬 하루를 보냈다. 하루를 보내고 나면 오늘 해낸 일을 적어두었던 투두리스트에 줄이 죽죽 그어진 걸 보며 뿌듯해할 수 있었다. 오늘도 성실하게 하루를 살았구나. 어딘가에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문제는 여기에 휴식이나 그저 재미만을 위한 시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거다. 나는 점차 지치기 시작했다.




본래 나는 지금처럼 집안일을 하지 않았다. 체력이 약하고 몸이 자주 아팠기 때문에 일주일의 절반은 남편이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아이들을 등교 시켰고, 식사는 남편이 미리 준비해 둔 냉동식이나 간편식을 먹었으며, 설거지 역시 남편이 해주었다. 당시의 나는 하루에 두 시간 글을 쓰고 간편식으로 식사를 하고 아이들을 챙겨 재우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힘들어 했다. 힘들 때 아이를 맡기기 위해 친정 엄마가 사는 지방으로 이사를 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운동을 하고 체력이 좋아지면서 나는 늘 그려왔던 삶을 살게 되었다.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고된 직장 생활을 하고 돌아온 남편이 쉴 수 있도록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과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는 것. 더할 나위 없는 이 삶에 나를 위한 시간이 안배 되어 있지 않다는 걸, 나는 완전히 지쳐버린 뒤에야 깨달았다.


나는 취미가 많다.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느긋하게 차 마시면서 일기 쓰는 것도 좋아한다. 줄글로 긴 일기를 쓰는 것도 즐겁지만 스티커와 떡메를 덕지덕지 붙이는 다꾸도 좋아하고, 닌텐도와 플스와 스팀으로 게임하기도 좋아한다. 백화점 쇼핑은 어렵지만 백화점 옆 갤러리에 가는 건 좋아하고, 영화는 즐기지 않지만 뮤지컬이나 연주회는 좋아한다. 위스키와 하이볼도 사랑한다.


전에는 체력이 부족하니 늘 누워 있기 일쑤였고, 누워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곤 했었다. 나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나 <공부의 위로>같은 에세이도 좋아하지만 <사피엔스>나 <블랙스완>같은 두꺼운 책도 좋아하고, <나 혼자만 레벨업>이나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같은 판타지도 좋아한다. <재혼황후>나 <루시아>같은 로맨스 소설도 좋아한다. <스타듀 밸리>에서 세바스찬과 결혼을 했었고, <다키스트 던전>에서 가장 어두운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으며, <발더스 게이트3>에서 문어의 존재에 충격을 받고 세상을 폭파시키고 싶기도 했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하데스>나 <위쳐3>, <엘든링>을 집으로 들여와 먼저 즐겼던 게 나였다.


너무 지쳐 아이들을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멍하니 늘어져 있던 밤에 문득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두꺼운 책을 읽은 게 언제였던가. 한 번 시작하면 '빠져들어 다른 일에 방해가 될까봐' 젤다도, 원신도, 코스모스와 사회심리학 책도 미뤄두고서 그저 하루하루 살기만 했다. 한 달 내내 일기를 한 번도 쓰지 못했다. 찻잔과 찻잎, 술은 리모델링한 집을 빛내주는 예쁜 장식일 뿐 제 용도를 찾지 못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남편의 회사는 상장 후 더욱 바빠졌고, 남편은 받은 돈 만큼 일하기 위해 밤과 주말을 반납해야 했다. 게다가 친정 엄마는 조카가 태어난 이후 맞벌이하는 동생을 위해 종일 조카를 돌봐주셔야했다.


나는 재미를 포기하기로 했다. 돈으로 시간을 사기 위해서.




집에 사람을 들이는 일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나처럼 낯을 가리고 사람 대하기를 불편해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나는 집에서 일하기 때문에 도우미가 와 있는 내내 집에 함께 머물러야 했다. 맙소사,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일을 시켜놓고 몇 시간씩 함께 머물러야 한다고? 그 사람이 일을 잘 못하는지 지켜보다가 한 번씩 지적도 해야 한다니!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일이 존재할 수가! 차라리 그냥 내가 하면 안 될까? 하지만 남편은 단호했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용기를 내서 업체를 알아보고 사람을 불렀다. 제일 처음 구한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집안 청소를 해주실 분이었다.


사람을 쓰는 건 예상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업체를 통해 부른 사람들 중 몇몇은 우리 집에 사는 고양이가 무섭거나 고양이 털 알레르기 때문에 일할 수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우리 집에 와서 일하는 시간의 절반을 식탁에 앉아 전화 통화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놀다가 돌아갔다. 돈을 주고 사람을 불렀는데 내가 화장실 수전을 닦아야 하는 상황이 기가 막혔다. 또 다른 누군가는 나에게 자신은 이걸 치울 테니 나에게는 그걸 치우라고 시켰다. 그는 나에게 반말을 했고 남편에게는 존댓말을 했는데 남편은 그걸 용납하지 못했다.


지금의 매니저님을 만난 건 정말이지 행운이었다. 이 일을 오래하셨다는 매니저님의 집안일 솜씨는 놀라울 정도였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걸레와 행주를 쓰신 뒤 팍팍 삶아주시는 것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조용히 집안일을 해주시고 말 없이 돌아가시는 덕에 내가 불편하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정말 좋았다. 아이들을 좋아하셔서 아이들이 따라다니며 말을 걸어도 기껍게 대꾸해주셨다. 우리는 원래 드리기로 했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드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집안일이란 일주일에 한 번 청소를 해주신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화장실 청소나 재활용 쓰레기 정리 같은 것들은 일주일에 한 번 와주시는 매니저님과 로봇청소기 만으로도 꽤 해결할 수 있었지만 설거지와 빨래는 매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한 번 더, 이번에는 매일 와서 나머지 집안일을 해주실 분을 부르기로 했다.


몇 번의 면접을 거친 끝에 부르게 된 이모를 가장 반긴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하교 전에 돌아가시는 매니저님과 달리 이모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이모는 하교하고 돌아온 아이들에게 간식을 챙겨주셨고, 집안일을 마치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소소한 놀이를 함께 해주셨다. 아이들은 이모와 친해지고 싶어했고, 이모를 기다렸다.


나 역시 이모가 반가웠다. 이모가 나에게 준 시간 덕분이었다. 이모가 와준 덕에 나는 하루에 무려 서너 시간이나 되는 자유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읽고 싶었던 책을 잔뜩 읽었고 일기를 썼고 너무 늦기 전에 잠자리에 들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이모가 내 마음에 쏙 들었던 건 아니었다. 이모는 손이 빨랐고, 빠른만큼 꼼꼼하지 않았다. 나는 이모가 돌아간 재활용을 다시 씻어야했고, 이모가 검은 빨래에 섞어 아이들의 하얀 옷가지 개는 입을 없게 되어 버려야 했다. 그럼에도 이모는 나에게 빛이었다.


늦은 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늘어진 남편이 깨끗한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진 거 없는 흙수저가 집안일 해주는 사람을 다 쓰게 됐다고. 그러게나 말이다. 결혼할 적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삶은 점점 나아지는 듯 보였다. 나는 여전히 백화점이 어려웠고 비싼 차나 명품은 사지 않았지만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는 게 어떤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일기장 가득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과 배우고 싶은 것 따위를 적었다. 경매에 가보고 싶었다. 갤러리에서 그림을 사보고 싶었다. 신혼 여행과 첫째를 낳은 후, 딱 두 번 가봤던 해외 여행을 조금 더 가보고 싶었다. 출퇴근이 가능한 작업실을 마련하고 싶었다. 유화를 배워보고 싶었다. 아, 뭘 먼저 하면 좋을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꿈에 부풀어 있던 어느 날 저녁, 울상이 된 큰 딸이 말했다.

"엄마, 친구들이 나보고 불쌍하대."


맙소사. 불쌍하다고? 대체 왜?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지난 일요일이 어린이날이었던 관계로 글이 하루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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