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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노란 Apr 28. 2024

돈으로 행복을 사는 법 2

리모델링을 했다

나는 17년된 지방 아파트에 산다. 내가 이사오기 전에 살던 집 주인은 집 꾸미기를 좋아하는 분이었다. 처음 입주할 때 집에 원목 마루를 시공하고 베란다 가득 화분을 키웠으며 벽에는 직접 그림도 그리셨다. 덕분에 리모델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오래된 아파트임에도 꽤나 깔끔했고 분위기도 따뜻했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는 법.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오고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를수록 집은 망가져갔다. 천장에 설치된 형광등이 깜빡여 LED 등으로 바꿔 달았고, 문 손잡이가 부러져 새 손잡이로 바꿨다. 어떤 손잡이는 망가지지 않았지만 부식되어 만질 때마다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고, 10년 넘게 화장실에서 버텨온 줄눈에는 곰팡이가 빼곡했으며, 집주인이 시공한 나무 마루의 코팅이 벗겨지며 아이들의 발바닥에 수시로 가시가 박혔다. 그 중에서 가장 나를 힘들게 한 것은 10여년 전에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분홍색 꽃이 가득한 벽지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 집을 좋아했다. 신혼집으로 썼던 원룸에 비하면 이곳은 궁전이었다. 불꺼진 밤이면 쥐가 바스락거리고 바퀴벌레가 날아다녔으며 음식을 조금만 흘려도 빨간 개미떼가 나타나던 자취방에서도 1년이나 살았던 나였다. 한 겨울에도 따뜻한 나무의 질감이 좋았고, 여름이면 해가 짧게 들고 겨울이면 길게 드는 창문의 방향도 좋았으며, 층간 소음으로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이웃들도 좋았다. 5년 가까운 시간동안 한 동네에 뿌리 내리고 산 덕에 이제는 동네 엄마들, 자주가는 상가의 사장님, "어! 그 누나네 엄마다!"하고 알아봐주는 아이들과 두루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집과 동네를 사랑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주식이 많이 오른 걸 알았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은 이사였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를 사랑했지만 이곳은 객관적으로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는 버스가 30분에 한 대 밖에 오지 않는다. 그나마 버스가 자주 오는 버스 정류장까지 가려면 15분을 걸어야 하는데 8차선 도로를 포함한 6개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지방이라 교통량이 많지는 않아 차가 있다면 좀 더 편하게 다녔겠지만 나는 겁이 많고, 길눈이 어둡고, 해가 진 뒤에는 빛번짐까지 심해 운전을 잘 하지 못했고 늘 대중교통을 타야했다.


넘실거리며 빨갛게 올라가는 주식 차트를 보며 우리는 난생 처음 부동산을 알아보았다. 10억으로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어디 있을까. 남들은 다 꿰고 있다는 서울 아파트 가격을 나는 이제야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세상에. 아파트 단지 안에 초등학교가 있다고?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학교를 갈 수 있는 동네가 있다는 것이 정말 충격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가 아주 좋은 단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좋은 세상이 존재할 줄이야! 나는 결심했다. 여보, 나는 잠실 엘스가 좋아!


하지만 우리는 당장 이사를 결심하지 못했다. 주식이 조금 더 오르면 팔고 싶다는 약간의 욕심, 그리고 이제 막 학교 생활에 적응해 가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남편은 회사의 주식이 몇 년 정도 지나면 더 오를 것 같다 생각했고, 나는 만약 이사를 해야 한다면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로 진학할 때를 맞추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이사 계획을 임시 보류하고 보유한 현금으로 낡은 집을 고쳐 살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파트 리모델링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기왕 돈 들이는 거 제대로 하자.


리모델링을 시작하며 내가 다짐한 가장 중요한 한 가지였다. 공교롭게도 때마침 코로나로 인해 인테리어 업계는 호황이었고, 인건비와 자재비가 올라 코로나 이전에 비해 공사 비용이 2배 가까이 비싸졌으며, 그와 함께 자격 없이 사기를 치는 업체 때문에 인터넷 뉴스 등이 한참 나오던 시기였다. 걱정이 됐다. 무던한 남편이야 물이 잘 나오고 불이 잘 켜지고 창문이 잘 닫히는 정도라면 공사가 잘 되었군, 생각할 테지만 나는 도배 벽지 이음매가 조금만 틀어져도 진저리를 칠 사람이었다.


기왕이면 실력 좋은 업체를 고르고 싶었지만 서울의 유명한 업체들은 지방까지 내려와서 공사를 해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사는 지역에는 실내건축면허를 가진 업체가 없었고, 아쉬운대로 경기도에서 평판이 좋은 업체를 골라 내가 사는 지역까지 내려와 공사를 해주십사 부탁드렸다. 업체가 보내준 공사 견적서의 비용은 내가 사는 지역의 무면허 업체에서 보내준 견적서보다 40%나 더 비쌌지만 받아들였다. 돈을 다 날리느니 돈을 조금 더 들이더라도 제대로 하고 싶었다.




나는 디자인을 전공했다. 진저리나는 대학시절을 거치며 지금은 디자인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들이 얼마나 힘겹게 일하는지 안다. 그들은 #F6F6F6과 #EAEAEA의 차이나 1mm 간격과 1.5mm 간격의 차이를 눈알이 빠지도록 들여다 봐야하는 사람이었고 인테리어를 시작한 이후 나 역시 그들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인테리어에 무지했던 나는 난생처음 인테리어 책을 읽고, 리모델링 책을 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찾지 못했을 때는 아예 건축 면허 자격 시험 도서를 뒤져보기도 하며 전혀 몰랐던 것에 익숙해져갔다. 생활 패턴에 맞춰 방의 구조나 붙박이 가구를 설계하는 것은 물론 네추럴 화이트/웜 화이트/크림 화이트 같은 이름의 벽지와 타일과 시트지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어떻게 색을 맞춰야 가장 내 취향이면서도 예쁠지 고민했다. 그에 어울리는 가구와 조명도 고민했다.


그 과정은 즐거우면서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새로운 분야를 알아가는 일은 흥미로웠지만 가구와 조명을 고민하는 일이 힘들었다. 저렴하면 품질이 엉망이었고, 좀 예쁘고 고급스러운가 싶으면 너무 비쌌다. 나는 마음에 쏙 들었던 조명이 2천만원이었을 때의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맙소사, 2천만원이라니! 하지만 나 역시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이었고, 비록 벼락 부자였지만 어쨌든 돈이 좀 생긴 사람으로서 남의 디자인을 따라 만든 가품을 내 집에 전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격이 너무 비싼 덕에 고민할 필요 없이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었다. 무난한 다운 라이트, 무난한 핀 조명, 무난한 라인 조명 같은 것들로 집안을 채울 계획을 세웠다.




공사는 방학 중에 이뤄졌고, 아이들은 시댁과 친정에서 각각 한 달간 지내게 되었다. 때마침 회사 일이 바빠질 시기라 남편은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하기로 했고, 나 혼자 고양이들과 공사가 진행되는 집 근처에 남아 수시로 공사 현장을 들르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지인들, 특히 애들 친구 엄마들은 눈을 크게 떴다. 두 달간 혼자 지내신다고요? 애들도 남편도 없이요? 세상에, 주식보다 리모델링보다 그게 더 부러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 아이들은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종달새였고, 내 귀에서는 늘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나는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나로서 온전한 시간 역시 사랑했다. 리모델링이 진행되는 동안, 현장을 살펴야 하는 며칠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나는 운동을 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밀린 일기를 실컷 썼다.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틀어 놓고 고양이들과 방바닥에 누워 뒹굴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말이지 그 두 달 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렀던 때는 없었다.




업체 선정부터 공사까지 반 년 넘게 진행된 리모델링의 여정의 마무리되던 날. 나는 예전 집의 자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새 집에서 간간이 찾아오는 가구 배송 기사분들을 맞으며 종일 음악을 들었다. 분명 동네도, 이웃도, 현관도 예전과 똑같은데 내가 발 딛고선 이곳이 내 집 같지가 않았다.

가구가 들어오던 날

좋았다.


그것 말고는 달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양말을 신지 않아도 발에 가시가 박히지 않았다. 냉동실 문을 열 때마다 문틈에 생긴 하얀 얼음 조각을 긁어낼 필요도 없었고, 식세기가 터져서 주방이 물바다가 되는 일도 없었다. 잠그지 않아도 문이 닫혔다. 화장실 줄눈에 옹기종기 모여살던 곰팡이들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온 집안이 내가 좋아하는 따듯한 흰색이라는 점이었다!


예전 우리집은 어디서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어둠침침했다. 온 집안이 온통 호두 나무 색깔이거나 빈티지 바로크 스타일의 무늬가 그려진 벽지이거나 화려한 핫핑크색 꽃이었으니 그럴 만 했다. 덕분에 사진은 그나마 흰색이던 식탁 위에서만 찍어야 했는데 이제는 어디서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대체로 맑고 희었다.


나는 사진을 많이 찍었고, 동영상은 더 많이 찍었다. 굳이 집 앞 카페에 갈 필요가 없어졌다. 햇살 좋은 날에는 커튼을 열고 시원한 콤부차 한 잔을, 서늘한 날에는 커튼을 닫고 따뜻한 홍차 한 잔을 우리면 우리 집이 카페보다 더 예쁜 카페가 되었으니까.


정성과 돈을 들여 집을 예쁘게 만들어 놓고 나니 이사가 가고 싶지 않아졌다. 이렇게 예쁜 집을 몇 년 살다가 남에게 줘야 한다니! 결국 우리는 3년 정도 살다가 이 집을 팔고 서울로 이사하겠다는 결심을 버렸다. 언젠가 서울로 가거나 가고 싶어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가까운 몇 년 안에는 그러고 싶어질 것 같지 않았다. 아이들을 보낼 동네 중학교에 대해 알아보았다. 아이들 친구와 친구 엄마들을 불러 집들이도 했다.


예쁜 집에 살기 시작하면서 괜스레 내가 더 괜찮고 아름다운 사람이 된 것만 같아졌다. 이것저것 주워입던 잠옷의 위 아래를 맞췄다.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대로 쓰던 머그컵 대신 좋아하는 찻잔을 꺼냈다. 나는 내가 가진 더 나은 것들로 순간을 채우고 싶어졌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인테리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더니, 이래서였구나.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무르는 공간이 깨끗하고 아름다워야 머무르는 내내 즐겁고 행복할 있다는 것을. 역시, 남들이 좋다고 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새삼스럽게 세상의 일부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라 나는 조금 더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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