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치 일기장과 노트 정리하기
집을 떠나 독립해 생활하며 작성했던 10년 치 노트를 모두 정리했습니다. 그동안 노트 정리를 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나 방법보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쓴 일기나 글을 버리고 후회하면 어쩌지? 에 대한 걱정이 가장 많았고, 과연 내가 이것을 다 정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마음도 컸습니다. 하지만 막상 정리를 하고 나니 작성하는데 걸렸던 10년이라는 세월에 비해 정리하는데 든 시간은 매우 미미했고, 정리가 끝난 뒤에 후회도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2000년부터 썼던 노트는 모두 54권이었습니다. 아이디어를 정리하거나 회의록 작성, 업무(작업) 일지, 정보 메모 등 다용도로 사용했던 노트가 35권이었고 스케줄러 겸 일기장으로 사용했던 프랭클린 플래너는 바인더가 4개밖에 되지 않았지만 페이지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했던 연습장은 10권이, 가계부는 5권이었습니다. 가계부를 제외하면 1년에 약 5권 정도의 노트를 사용한 셈입니다.
이 54권의 노트를 모두 이미지화하는 데는 총 40시간 정도가 걸렸고, 이미지화가 끝난 뒤에는 작은 USB 한 개를 가득 채울 정도의 이미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동안 제가 노트들을 제 몸통보다도 더 큰 상자에 보관했던 것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많은 공간이 절약된 것입니다. 이런 공간 절약이 미니멀리즘 실천을 통한 가장 가시적인 성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노트들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정리하였습니다.
1. 사진 또는 스캐너를 이용해서 노트의 표지와 내용을 이미지화한다.
2. 이미지화가 끝난 노트는 버리거나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노트 이미지화는 사진 또는 스캐너를 이용했습니다. 사진으로 찍으면 무척 간편하게 노트의 내용을 이미지화할 수 있지만 화질이 나빠지거나 조명으로 인한 색상 손상, 사진 기술 부족으로 인한 왜곡이 자주 발생해서 중간 이후에는 모두 스캐너를 사용했습니다. 어학 공부할 때 썼던 깜지나 시험지는 이미지화하지 않았고, 또 성의 없는 낙서 등 보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그림들 역시 이미지화하지 않았습니다.
이미지화가 끝난 노트들은 모두 버렸습니다. 사용하다 만 노트의 경우 사용한 부분을 깨끗하게 잘라낸 뒤 필요한 분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참고로 실 제본이나 떡제본처럼 사용한 종이를 뜯어내면 티가 나는 노트는 남은 부분이 있더라도 그냥 버리는 것이 더 좋고, 스프링 제본처럼 사용한 종이를 뜯어내도 남은 노트를 깨끗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경우에는 새 것 같은 상태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 있습니다.
노트를 이미지화하는 과정은 참 흥미로웠습니다. 단순히 아날로그 노트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이 아니라 옛 기억을 들춰보고 그 시절을 떠올리고, 잊혔던 지식을 다시 상기시키고 자신이 변화하는 과정과 성장하는 과정을 빠르게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노트 뒷장에 살그머니 적어 놨던 시 한 구절, 7년 전 그 날 있었던 사건, 결혼 준비를 하며 금전 계획을 적어놨던 종이 조각, 아이를 낳기 전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지 고민했던 흔적들... 잊고 지내던 과거를 미니멀리즘과 노트 이미지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날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2014년 전후부터는 대부분 아날로그 방식이 아닌 디지털 방식으로 메모를 하고 있습니다. 필기구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여 쓰고 볼 수 있다는 점이 무척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저장 매체의 발전(공간 대비 저장 용량의 증가)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한 아마 이 방식의 메모가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메모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니멀리즘 실천의 큰 산이라고 생각했던 노트 정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아직 정리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이 남아있지만 어떻게든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생겼습니다.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시작하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께 이 글이 조금이나마 마음의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