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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리 Jan 25. 2022

항히스타민제와 우울증

명확한 이름을 말하기 싫은 질환을 앓고 있다. 용어를 명확히 발음하거나 쓰는 것만으로 증상을 겪을 때의 감각이 끔찍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신체에 히스타민이 과다 분비됨으로써 온몸에 꽃이(..) 피는 질환이라 보면 되겠다. 대상포진과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이것은 증상이 시작될 때면 몇 시간이고 지속된다. 무엇도 할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초기였으면 치료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거였는데, 당시에 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중이어서 병원에 시간을 내기가 마땅치 않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도 증상이 사라지면 이제 괜찮겠지, 하며 미련하게 있다가 다시 앓는 걸 몇 번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가라앉지 않게 되어 도저히 견딜 수 없어지고서야 병원에 갔다. 종합검사를 하고서 진단을 받은 뒤 며칠 치의 약을 받았다. (그때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내게 키위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이다. 키위를 먹을 때 혀에서 느껴지는 통각에 가까운 까칠한 감각이 좋았는데, 그게 사실 알레르기 반응이라고.)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뒤로 증상은 사라졌지만, 깜빡하고 약을 잊은 날이면 어김없이 울긋불긋 온몸에 꽃이 피었다.


좀처럼 완치가 되지 않고 증상을 잠시 멎게 하는 데만 그치자 엄마는 나를 한의원에 데리고 갔다. 한의원에서는 양약을 복용하면 안 된다고 했다. 당장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겠지만 몸에 독소가 쌓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치료가 될 수 없다며 한약을 지어줄 테니 먹고 주기적으로 침도 맞아야 한다고 했다. 그뒤로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침을 맞으러 한의원에 갔고, 몸의 독기를 제거한다는 한약을 매일 먹었다. 하지만 이러한 체질 개선의 노력이 무색하게 증상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양약을 먹으면 바로 가라앉을 텐데 그게 장기적으로 해롭다는 말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나아지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면 전보다는 덜 아플 거라고 암시를 걸면서. 같은 질환을 앓는 사람들의 카페에도 가입해 정보를 공유했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들은 말과, 증상 개선에 도움이 되었다는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는 엄마를 설득해 병원에서 항히스타민제를 다시 처방받았고, 고작 한 알에 전부 괜찮아졌다. 일시적이지만 완벽하게. 현대의학으로 완치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하루에 한 알씩 잘 먹기만 하면 문제없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어떻게든 나아보려 인터넷과 책을 섭렵하고, 그로 인해 잘못된 정보를 맹신하며 의사의 소견에 반박하는 시기를 지나서, 하라는 대로만 하고 나머지는 원래의 일상에 집중하기로 하고부터 삶이 조금은 견디기 수월해진 것 같다.


실패의 경험 덕분일까. 우울증도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오랫동안 내 처지를 원망했고 밑바닥 아래에 더 바닥이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했지만, 필요한 건 거대한 용기나 간절함보다도 담담함이었다. 약을 먹으면 괜찮아진다는 것. 여전하면 비상약을 먹어보고. 완치만 보면서 살면 매일이 실패고, 그게 나를 더 죽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 삶의 결이 조금은 바뀌었다. 약은 내가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잘 먹고 하루를 잘 영위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였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 안에서 평온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 깨달음의 시작은 사실 체념이었지만 뒷걸음쳐 발견한 이것이 되려 정답에 가까웠다.


지금도 여전히 하루에 한 알의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고 있다. 항우울제는 최근에 끊었고 전에는 느낄 수 없던 평온함을 신기하게 여기는 날도 있다. 하지만 전에는 생각지 않던 새로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나아진다는 건 대체 뭘까? 지나왔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 된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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