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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리 Jan 26. 2022

항히스타민제와 우울증(2)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무언가 그르칠 때면 손이 아리고 가슴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오는 이유에 대해서 나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그보다 이유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다들 이런 걸 잘도 견디면서 학교에 가고 회사에 가고 내일을 기약하는구나, 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모두가 겪고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다 힘들고 그렇지만 견디며 살고 있다는 말을 평생 들어왔으니 깨닫는 데에 시간이 더 걸렸다.     


병원을 다니기 시작하고부터 십 년 동안 약을 먹었다. 긴 투병 생활은 정말 평범한 날이 없었던 거 같다. 이것은 호전되거나 나아지지 않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멋대로 약을 끊고,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카페에 엎어진 채 첫차를 기다린 날이 많았다. 몇 번의 입원을 했다.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렸고 누구를 만나든 슬픔을 터뜨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관계에 지나치리만치 기대를 품었고,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좌절되었고, 그럴 때면 더 내려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바닥 아래에 또 다른 바닥이 있다는 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깨달은 사실이 있다. 우울증에 있어서 나아짐이라는 건 도약과는 무관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드라마틱한 경험을 통해 건강한 삶에 관한 실마리를 발견했다가도 다시금 온통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파국으로 치닫고, 나아진다는 일에 거부감을 느끼다가도 살고 싶어져서 이를 악물기도 했다. 건강한 생각, 그러니까 정답에 가까운 자세에 대해 우울증 환자들은 꽤 잘 알고 있다. 다만 이 노력이 결과를 향해 잘 가지 않으니까, 반복과 퇴행을 지켜보며 믿음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 문제다. 결국 몸으로 깨달아야 한다. 지긋지긋하게 앓다가 어느 순간 엎어진 나를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밥을 거르진 않았는지, 자기 전에 약을 먹었는지, 조금이라도 운동을 했는지, 찾아온 우울에 명확한 근거가 있는지. 빠뜨린 것들을 생각하며 채우다 보면, 어쩔 수 없는 부분 못지않은 ‘자초하고 있던 우울’을 자각하게 되고, 그러면 전과는 다른 대처를 하는 날도 생긴다. 한 번 그런 식으로 넘기고 나면 작은 믿음이 생긴다. 지나갈 거라는 믿음이.     


이렇게 결론이 나면 참 아름답고 교훈적인 글일 텐데 말이지. 나는 여전히 자주 우울하지만 이제 항우울제는 먹지 않고, 시시때때로 찾아오던 흉통도 이제 없다. 문득 든 생각에 손이 아려오지도 않는다. 잔물결 같은 행복을 알아채고 잔잔하게 웃는 날도 있다. 이제 그 시절을 완전히 지나온 걸까. 슬픈 사람일지언정 아프지는 않게 된 건가. 그런데 왜 그 사실이 그리 기쁘지가 않을까? 오래 생각을 했다.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나의 긍정적인 태도와 그에서 비롯된 노력은 미미하게나마 결실을 맺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시간이 많이 지나 그 시간을 돌아보고 있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극복했다’는 명쾌하고 능동적인 말로는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다.


한의원을 끊고 다시 양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병이 삼십 대 후반을 기점으로 자연치유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화가 시작되면서 신체의 많은 부분에 변화가 일어나니까 그 영향이라는 것 같다. 우울증의 경우도 실제로 나이가 들수록 호전되는 경향이 있다. 환우들 다수가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고 해가 지날수록 전보다 낫다는 말을 많이 하는 걸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에 안도와 희망과는 동떨어진 기분을 느낀다. 오랜 시간 함께해서 몸이 되어버린 우울이제 없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도 있지만,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 시절을 그렇게 보내야 했던 걸까. 버티거나 그러지 못해 꼴사납게 엎어지고 누구와 긴밀해졌다가 내 감정에 좀먹히게 만들고, 후회하고, 다시금 부여잡았던 많은 날들에 이유 같은 게 있을 리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왜라는 의문이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극복 같은 게 아니라면, 견딘 게 아니라면. 고통 속에 울며불며 의미를 골몰하던 사이,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호르몬의 변화 같은 게 일어났고, 그래서 전보다 살 만해진 거라면. 그저 죽지 않다가 사라지고 희미해진 거라면 나는….


요즘 나는 죽고 싶어하지 않는 날을 자주 보낸다. 전처럼 간절하게 그것만이 남은 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다만 한없이 누워만 있고 싶다. 음악도 책도 멀리 치워둔 채. 눈 감고. 아주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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