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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피아노 Sep 23. 2023

건강한 소리는 건강한 몸에서 나온다

피아노와 운동

피아노를 잘 치려면 손가락 힘으로만 치는 게 아니라 온몸을 다 사용해서 쳐야 하는 걸 알고 있는가? 나는 초등학교 4학년쯤 됐을 때 처음으로 남자아이들이 치는 소리를 들으며 이 사실을 깨달았다. 무대에서는 맨 뒤에 앉은 사람에게도 소리가 잘 전달되는 게 중요하다고 여태 배웠던 모든 선생님들이 말씀하셨다. 그런데, 콩쿠르 객석에 앉아 있다가 남자아이의 소리가 바로 전에 연주했던 여자아이의 소리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소리가 큰 연주는 소리가 작은 연주보다 섬세하지 못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소리가 다 크기만 해 아름다운 연주라 보긴 힘들었지만 소리의 볼륨으로만 보자면 둘의 연주는 큰 차이가 났다. 누군가가 지나가는 말로 '역시 남자애들을 이길 수 없어'라고 말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나에게 스스로 한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의 유입경로는 확실하진 않지만 내 머리 깊이 그 생각이 박였다. 


또래보다 잘 먹었는데 이상하게 또래보다 항상 키가 작고 삐쩍 말랐었다. 피아노 선생님께서는 내가 살을 찌우면 용돈을 주시겠다고까지 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은 체구가 작은 사람보다 큰 사람이 더 잘 친다는 뜻?' 확실친 않았으나 다른 이들의 연주를 들어 보면 왠지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나는 살찌기로 다짐했다. 당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이 먹는 것밖에 없었는데 다들 놀랄 정도로 많이 먹는 건 원래도 많이 먹었어서 이보다 더 많이 먹기는 어려웠고 체중은 늘 그대로였다. 어떤 세계에서는 마른 사람이, 또 어떤 세계에서는 뼈가 굵고 체격이 큰 사람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 내 몸은 불리한 조건을 많이 가진 몸이었으므로 내 몸을 어여삐 보기 어려웠다.


고등학생 때 미국에 와서 놀란 점 중 하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운동에 진심이라는 것이었다. 미국 대학은 학교 운동팀 활동 경험, 각종 운동 대회 수상 경력을 정말 높이 사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다들 팀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라고 했다. 한국의 체육 시간은 툭하면 자습 시간으로 바뀌었었고 악기 하는 아이들이 많이 모인 학교였으므로 손 다치면 큰일 난다는 생각에 조금만 위험해 보이는 운동도 하지 않으려 했다. 학교 끝난 후에도 연습하고 공부하고 숙제할 시간도 모자란데 운동할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운동신경이 형성될 그 시기에 아무 운동도 하지 않았던 비실비실한 나는 다부진 몸과 엄청난 힘을 가졌으면서도 날렵한 미국 여자 아이들이 낯설면서도 경이로웠다.  


운동신경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니 아예 운동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게 마음 편했다. 공을 갖고 하는 운동은 공이 무서워 싫었고 수영은 물이 무서워 싫었고 다른 운동은 다른 사람들이 우습게 볼까 봐 싫었다.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달리기나 조깅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운동은 다이어트 때문에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늘 마른 몸을 가졌었으므로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30대인 지금의 나는 하루라도 운동하지 않으면 하루종일 찜찜하다. 아침에 운동하지 않으면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우므로 운동하려고 일찍 일어난다. 여행을 가도 호텔 헬스장을 꼭 확인한다. 헬스장이 없으면 밖에 나가서 달리기라도 한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운동 클래스도 씩씩하게 간다. 여전히 운동 신경은 없어서 남들보다 잘 못하는데 아무 상관없다. 중요한 연주날 아침은 오히려 더 길게 운동한다. 그래야 더 자신 있게 연주할 수 있다. 


이렇게 변한 데에는 몇 가지 전환점이 있다. 20대 중반 야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며 나도 밤에 먹는 라면의 맛을 좋아하게 돼버렸고 밤 11시만 되면 배고프기 시작했다. 이 생활패턴은 금세 몸으로 드러났지만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다. 그 무렵 멀리 사는 친구가 우리 집에 며칠 묵게 되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서로의 모습을 보고 둘 다 놀랐다. 그녀의 몸은 탄탄해져 있었고 나의 몸은 라면살과 짜파게티살로 부어있었다. 원래도 밝았던 그녀는 더 밝아졌고 강인해졌다. 우리 집에서 지낸 며칠 동안 그녀는 매일 헬스장에 가자 했고 나는 난생처음 그 낯선 장소에 든든한 그녀와 함께 발을 디뎠다. 그녀가 굳이 운동의 좋은 점을 말로 안 해도 그녀의 변한 모습은 나를 운동으로 전도하기에 충분했다.   


나의 첫 헬스장


그녀가 떠난 후에도 헬스장을 매일같이 다녔다. 신세계를 접하고 열정이 넘쳤던 나는 시간 날 때마다 근력 운동의 종류, 그 운동의 효과, 어떤 루틴으로 해야 하는지 찾아봤다. 평생 데리고 산 몸인데도 모르는 근육이 많았다. 이두와 삼두가 따로 있는 것도, 어깨 전면, 측면, 후면 근육이 다 다른 것도, 등에도 근육이 있다는 것도, 깊숙이 파묻혀 있던 코어의 존재도, 아예 몰랐었다. 


운동을 시작한 후 피아노 연습을 할 때도 이 근육들의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열심히 단련해 온 손가락은 사실 손에 붙어 있고, 손은 팔에 붙어있고, 팔은 어깨에 붙어있고, 어깨는 상체와, 상체는 하체와, 몸의 모든 부위가 서로 다 연결돼 있음을 왜 몰랐을까. 건강한 소리를 내기 위해 필요한 건 건강한 몸이었다. 불필요한 곳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 위해선 필요한 근육이 강해야 했다.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끈기 있게 연습하기 위해선 강인한 정신력보다 강인한 체력이 먼저 필요했다. 무대에서 기죽지 않으려면 몸의 기가 강해야 했다.  


매일 아침 1시간씩 운동하고, 정성 스래 차린 아침밥을 먹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오후에는 피아노 연습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자기 전에는 요가를 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 할머니가 되려면 일단 건강해야 하니 내일 아침에도 열심히 땀 흘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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