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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의 담소 Oct 22. 2023

내 방에서 넷플릭스 보고 갈래?

미국판 라면 먹고 갈래?

 국제 학생들은 개강보다 일찍 미국 기숙사에 도착한다. 캠퍼스 투어부터 수강 신청 방법, 참가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미리 소개받기 위해서다. 그렇게 일찍 도착한 각국의 학생들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금방 친해진다. 교환학생 외에도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한국인이 유독 많았다. 그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면 영어가 늘 것 같지 않았고, 외국 친구들도 사귀고 싶었다. 그러나 영어로 대화하는 국제 학생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어 말 한마디도 걸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너 미국에 와서 뭐 하는 거야?'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하던 나는 그날 저녁 방에서 편지를 썼다. 누구에게 편지를 쓸까 하다가, 같은 층에 사는 독일인 D와 환하게 웃는 미소를 가진 일본인 H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1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미션, 친구들이 잘 때 방문 바닥 틈으로 편지를 밀어 넣고 도망가자! 12시가 되기를 나는 초조히 기다렸다. 친구들의 방문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H의 방은 조용했고, D의 방은 TV소리가 흘러나왔다. 목표는 절대 편지를 넣다 마주치지 않는 것. 편지를 넣다 마주치면, 그 상황을 영어로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각자의 방문 틈에 편지를 밀어 넣고, 방으로 잽싸게 도망쳤다.


 다음 날 H가 나에게 와서 웃으며 말을 걸어주었다. "어제 방에 넣어둔 편지 읽었어! 나도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편지 고마워. 내가 꼭 답장 쓸게." 반면 D는 내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볼 때는 말을 걸 타이밍을 보는 것 같다고 했지만, 나에겐 그 시선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편지를 보내고선 막상 내가 도망을 다녔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D를 포함한 다른 남학생 무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D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 나 편지 읽었어. 편지를 쓰다니, 너 되게 귀엽다.” 그러고선 다른 친구 방에 갈 건데, 자신의 무리와 같이 놀자고 했다. 같이 있던 한인 유학생과 함께 그들 무리에 섞여 방에 놀러도 가고, 지하실에서 당구도 쳤다. 그 후론 페이스북 친구를 맺어 메신저도 주고받고, 같이 장도 보고, 아웃렛도 구경하러 갔다. 편지의 목적은 나름 성공적으로 이룬 셈이다.


 한 번은 D가 "내 방에서 넷플릭스 볼래?"라고 물었다. 몇몇 친구들은 D가 나에게 적어도 호감이 있을 거라고 말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넷플릭스. 그러나 내가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만 해도, 한국에서 넷플릭스를 아냐고 묻는다면 그게 뭔데?라는 답이 돌아오던 시기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우리 집에 넷플릭스 보고 갈래?'라는 말이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와 같은 플러팅인지는 아무도 몰랐던 시기이다. 더불어 나는 어려서 플러팅도 모르는 수준의 눈치였고, D도 단순히 친구와 놀자고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저녁에 D의 방에 가자, 책상을 옮겨 침대 앞에 두고, 노트북을 보기 편한 위치로 조정했다. 그리고 나에게 '원피스'를 볼지, '아메리칸 파이'를 볼지 물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영어 자막이 깔린다는 건 상상이 안 갔다. 일본어가 들리는데 영어로 읽고 한국어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아메리칸 파이를 보기로 결정했다. 아메리칸 파이는 섹스코미디 영화라고 한다. 그런데 졸면서 보느라고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고, 옆을 보니 D가 어깨에 기대어 이미 잠들어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D를 깨웠다. D가 이제 자자면서 자리를 정리하고 불을 껐다. 그러고선 나를 안고 누웠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좁은 1인용 침대에서, 포옹한 상태로 얼굴을 맞대고 누웠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외국에선 영화 보다 친구끼리도 침대에서 같이 잠들기도 하나?' D의 콧바람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그 숨결이 따뜻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심히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자 D는 뒤에서 나를 더 꼬옥 안았다. 1인용 침대에서 2명의 성인이 누웠으니 좁을 수밖에 없었다. '방귀가 나올 것 같으면 어떻게 하지? 만약 자다가 내가 발로 걷어차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나는 D가 깨지 않게 살포시 일어나서 조용히 내 방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살며시 일어났지만, D는 바로 깨어나 물었다. "왜 그래?"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한 나는, 정말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내 방을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말도 안 남기고 방을 나가버린 여자애가 얼마나 어이없고 웃겼을까?. 친해지자고 먼저 편지까지 건네왔는데 말이다!!


 그 친구가 읽을 경우는 아주 희박하지만, 이 글을 빌어서 심심한 사과를 전해본다.

"D야 미안해. 너를 무안 주려던 건 아니었어. 근데 난 그때 너무 어렸고, '방으로 돌아가서 자겠다'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표현 못 하는 영어 수준이었어. 나중에 독일에 놀러 가면 꼭 맥주 마시면서 회포를 풀자."


 이 일 이후 D와 따로 노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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