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는 먹을 복을 타고났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이웃분이 마트 봉지에서 바나나 한 손을 꺼내 절반 뚝 떼어 건네주시고, 산책 길에는 어떤 어머님께서 갑자기 뻥튀기를 윤이 손에 쥐어주시기도 한다. 젤리곰, 사탕, 쿠키까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윤이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달콤함이 있다.
“감사합니다!”
어리둥절하면서도 기쁘게 친절함을 만끽하는 윤이의 쑥스러운 미소가 사랑스럽다.
윤이랑 다니다 보면 세상에는 아직 많은 다정함이 있다고 느낀다. 특히 어느 시절, 누군가를 돌봐본 경험이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은 윤이를 따듯하게 바라보거나 웃는 표정인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이웃들의 다정한 시선이 닿는 자리는 사실은 윤이가 아니라, 그 너머의 그 시절 그들이 사랑했던 아이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윤이의 어린이집에서 0세, 1세 아이들을 볼 때, 그 아이 자체가 귀여운 것도 있지만 윤이의 0세, 1세를 떠올리곤 한다. 아유, 우리 윤이도 저때는 저렇게 아장아장 걸었지 하며 내가 사랑하는 아이의 그 시절 모습을 본다.
그렇다면 다정함의 원천은 기억이 아닐까? 내가 사랑했던 존재의 기억을 품고 있다가, 그 기억이 톡 건드려지면 또르르 펼쳐진다. 그리고 이런 기억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의 마음에 더 민감해지고 그만큼 더 상냥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공감이 반드시 경험에서만 비롯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조금 더 다정해질 수 있었다. 나 혼자라면 눈인사도 건네지 않았을 사람들과 아이를 매개로 잠시나마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나에겐 그만큼 세상을 향해 문을 여는 느낌이다.
이제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경험이 드물어지는 시대다. 어린아이에 대한 기억이 없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럴수록 아이에게 불친절한 세상이 오지 않을까 조금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물론 아이를 낳겠다는 엄두가 나지 않는 무거운 현실이 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지금의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성장을 온전히 지켜본다는 것은 세대를 아우르는 기억이 생기는 일이다. 누구든 무조건적인 사랑과 돌봄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는 기억은 우리가 모두 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으로 돌보는 순간, 우리가 받았던 사랑을 새롭게 느끼게 된다.
아이든, 반려동물이든, 나무 사이의 햇살이든, 사랑하는 존재가 많아질수록, 우리의 다정함은 더 쉽게 더 멀리 퍼지는 게 아닐까 싶다. 부디, 이 세상에 다정함이 더 많아지기를. 우리가 사랑했던 기억들이 누군가를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오래 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