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기

by 연시홍

입사 동기 중 가장 먼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언니가 있다. 예쁘고 일도 잘해서 다른 팀에서도 탐내던 인재였다. 그런 언니는 첫째를 낳고 복직 후, 야근과 육아의 줄타기 속에서 힘들어하면서도 둘째를 낳고 싶어 했다. 처음 언니에게 둘째를 갖으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니 워킹맘은 너무 힘들어 보여. 난 진짜 못할 것 같아.“

“근데, 있잖아.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게 우리 딸 낳은 거야.“


당시 언니가 이뤄온 것들을 선망하던 나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엄마의 삶은 힘든 거 아니었나? 언니 인생에서 더 치열하게 노력해서 얻은 빛나는 성취가 많을 것 같은데,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그리고 몇 년 뒤, 윤이를 만나고서야 나는 저 말이 언니의 진심이었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의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윤이가 없던 시절의 내가 마치 전생처럼 멀게 느껴진다. 지금도 내 커리어와 성취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이 변했다. 예전의 나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변화였다.


러셀 로버츠의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은 직접 경험해야만 알게 되는 선택의 문제를 “뱀파이어 문제”라는 재미있는 개념으로 소개한다. 인간일 때는 남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가 되기 싫지만, 막상 뱀파이어가 되고 나면 사실 뱀파이어로써의 삶이 그다지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기 전 아무리 많은 장단점을 나열해 본들, 실제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나를 성장시킬 것으로 생각되는 경험이라면 그냥 뛰어들라고 제안한다. 막상 인생의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고 나면, 그전까지 단점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에겐 육아가 그랬다.


막연히 언젠가 아이 한 명은 낳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결혼 후 오빠와 종종 자녀계획을 논의하긴 했지만, 적당한 때를 결정하기란 어려웠다. 아이 때문에 지금 내가 누리는 자유와 안락함을 내어주긴 싫었다. 일단 아이를 낳으면 주말에 늦잠부터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아침잠 많은 나에게는 평생 짜장면만 먹고살아야 한다는 말보다 가혹했다. 임신을 한다면 당장 이직도 어려울 텐데, 언제든 이 회사를 떠날 수 있다는 마음속 사직서를 내 손으로 찢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미루기엔 생물학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초조했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를 탄 채 조금씩 절벽 끝으로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막상 아기가 생기고 나니, 그전까지 그렇게 포기하기 싫었던 것들이 크게 중요하지 않아 졌다.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고,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변화에 서서히 적응해 나갔다. 그리고 나는 뱀파이어로서의 삶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잠은 줄었지만, 윤이의 입꼬리에 번지는 웃음이 내 하루를 채웠다. 늘 불만이던 회사도, 내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준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더 많은 감사와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내 마음대로 누리던 주말이, 종종 떠나던 여행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그건 더 이상 나의 삶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변화는 언제나 고통스럽고, 나는 여전히 ‘한다’와 ‘하지 않는다’의 선택지 중 ‘하지 않는다’ 쪽에 매번 마음이 기운다. 그러나 선택 자체가 ‘나’라는 사람을 정의한다. 우리에겐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니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여진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과연 어떤 선택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까?”


선택은 우리의 삶을 새로운 페이지로 이끈다. 그리고 한번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다시 원래 페이지로 돌아가 같은 부분을 반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새로운 페이지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윤이와 함께 하는 삶을 사랑하게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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